우리에겐 사회적 어머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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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어머니처럼 따르던 분입니다. 이제 야단칠 어른이 안계셔 고아가 된 느낌입니다. 저희를 꾸짖으실 때는 눈물이 나도록 호되게 야단치셨지만 정보부에 끌려가서 열흘 동안 잠을 안재워도 그게 고문인줄도 모르셨던 순수한 분이셨습니다. 이우정 선생님은 함자처럼 어리석을 정도로 곧은 분이셨습니다.

“나를 이용해라. 나는 스페어 타이어야”라며 후배여성들에게 마음으로 다가서시던 일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원풍노동자들이 똥물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셨고 생존권을 박탈당한 노동자들을 보고 오신 날이면 그 마음이 너무 쓰려 밤새 잠 못 주무시고 기도로 마음을 달래기도 하셨습니다.

70년대에는 노동자, 농민여성을 위해 뛰셨고 진보여성단체가 없던 70년대에 유일하게 한국교회여성연합회를 만들어 80년대 여성단체들을 탄생시킬 씨앗을 뿌리셨던 분이기도 합니다. 군사독재시절에는 구속된 청년학생 석방운동에 매진하셨습니다. 90년대 후반에는 평화통일 운동에 헌신하신 분이십니다.

이우정 선생님은 참석하신 모든 국제회의마다 한국의 인권상황을 알리는데 힘쓰셨습니다. 막힌 담을 헐고 화해하고 평생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이김현숙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대표

그분은 우리들의 사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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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의 열기 속에서 삼베수건을 둘러쓰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에 항의하는 그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성운동 1세대로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민주화운동, 노동자 생존권, 통일운동에 앞장서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처음 본 것은 70년대 종로5가에서 항상 열리고 있던 민주화 기원 목요기도회였습니다. 체구는 작은 분이셨지만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항상 정치에서 배제된 여성들을 안타까워 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여성노동자를 위해 앞장선 선배님이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현실로 와닿지 않았습니다. 중환자실에서 그분을 뵈었을 때 어쩌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항상 포근하고 소녀같고 체구는 작았지만 열정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남긴 미완의 작업들은 우리 2세대들이 이어나갈 것입니다.

항상 일관된 삶을 사셨기에 더욱더 그분의 삶이 귀하게 빛을 발할 것입니다. 고인이 밟으신 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열심히 뛰겠습니다.

이오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이우정 여사 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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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상을 보는 김상근 목사가 저를 보더니“친구가 한 분 가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간다고 말도 않고 가셨어요”라고 어리석은 대답을 했습니다. 더욱 어리석어짐을 무릅쓰고 어리석은 말을 영전에 씁니다. 75년 여름에 서남동 안병무 문동환 그리고 제가 대학에서 해직 당한 후 갈릴리 교회로 모였을 때 당신께서는 우리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문익환과 더불어 이 반체제 고백교회의 설교자로 합류하셨습니다.

언젠가 서오능에 소풍간 것을 기억하십니까? 강의 후의 소풍이어서 저는 몸이 지쳐 있었는데 당신께서는 교도소에 영치금 넣을 일이 있다고 가셨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끈질기셨습니다.

우리가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갇혀 있을 때 어느새 당신은 미국에서 문동환과 더불어 쿠데타 정권의 악을 세계 만방에 알리셨습니다. 당신은 타고난 말솜씨와 영어능력을 지니셨습니다.

더 자꾸만 당신을 찾을 것 같아서 멈춥니다. 당신은 약한 자를 돕는 한 분의 여자 전도사이며 천사였습니다. 제 일을 제가 않고 당신을 찾는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더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이문영 경기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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