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은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WAW)가 주최하는 ‘소수자의 시선으로 북한 만나기’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거주하고 있는 북한여성들의 진솔한 목소리를 통해 가깝고도 먼 ‘북한여성의 삶’을 조명·연재한다. <편집자 주>

최진이씨-43세로 평양에서 살았다. 1998년 7월 탈북하기까지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에 온 지 3년쯤 돼 간다. 현재 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있다.

◇ 어떻게 작가가 됐나 = 집안이 문인이었다. 첫 작품이 평양신문에 났는데 비로소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작가동맹은 문예총 산하에 있는데 전국 한 곳이고 2년에 한 번 뽑는데 인원이 28∼33명이니 들어가기 매우 힘들다. 작가가 되면 신분이 갱신된 것이다. 노동자에서 간부가 된 것이니까.

◇ 작가의 일상 = 작가동맹에 매일 아침 8시 30분까지 출근한다. 그리고 30분은 김정일의 방침을 듣고 9시부터 12시까지 창작활동에 들어간다. 12시에 식사하고 1시부터 6시까지 또 창작활동을 한다. 그렇지만 학습당(도서관)에 간다거나 취재를 간다고 둘러대고 빠지기도 한다.

총화는 2일에 한 번씩 하는데 처음엔 서로 비판을 하지만 나중엔 비판이 주는 독을 느껴 꺼리게 됐다. 말이 사람에게 상처가 되고 그 상처가 자신에게 돌아온다. 주마다 간부학습반과 노동자학습반이 나뉘어서 총화를 한다. 수요강연회와 금요노동(지금은 폐쇄됐다)도 참여했다. 달마다 월생활 총화를 하는데 그건 강도가 세다. 분기당 총화가 있고 상반기 학습총화가 있다. 학습계획은 주로 김일성을 연구하는 일이며 시험에 통과해야 배급표를 받을 수 있다.

◇ 창작과 출판 = 창작활동은 시 소설 아동문학으로 나뉘는데 급수별로 발표해야 하는 편 수가 정해져 있다. 시와 가사는 5급의 경우 1년에 7∼8편, 4급은 11∼13편, 3급은 15편, 2급은 18편 이상이고 1급은 20편 이상 발표한다. 편당 34∼36원을 받는데 김정일에게 인정을 받으면 70원까지 받을 수 있다. 소설은 장편은 6년에 한편, 중편은 3년에 한편, 단편은 2년에 한편 낸다.

출판은 3년, 6년 단위로 창작기획을 해서 통과되면 인쇄하는데 부수는 50권 미만이다. 일반에겐 비공개이고 작가용으로만 출판한다. 교과서에 톨스토이 같은 거장의 작품도 담겨있지 않다. 김정일 생일에 세계아동문학전집이 학교에 배포된 적이 있다.

◇ 90년대 작가동맹의 변화 = 경직된 사회와 대조적으로 작가동맹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했다. 문학정신이 살아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점차 사주나 미신, 성교에 대해 관심이 쏠리는 것 같다. 친구들 사이에선 그런 책을 돌려보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도 궁합이나 성교에 대한 책을 돌리다가 걸린 적도 있다. 배급이 끊기면서 인텔리가 먼저 희생됐다. 작가들이 책을 지고 나와서 장사를 하게 됐다.

◇ 엘리트층의 남한에 대한 인식 = 북한 내 정보는 다 남한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는 것들이다. 경공업, 한국선박, 승용차 등을 통해 잘 산다는 것은 알지만 구체적인 그림은 없다. 생지옥과 천국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완전히 다른 세계다.

임수경의 방북은 북한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우린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공적인 발언만 하는데 ‘임수경은 저렇게 똑똑하게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는구나’하고 가슴을 쳤다. 또 ‘국경을 넘어 올 수 있는’ 용기에 대해서도 놀라웠다. TV에선 한국학생들의 시위를 보여주었지만 ‘쟤네는 시위하는 권리가 있나?’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북축구 교류 때도 심판의 편파판정이 심하다고 ‘저걸 보고 남한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나’ 통탄하기도 했다.

◇ 평양의 변화된 모습 = 평양이 잘 산다고 하지만 40% 정도만 상층이라고 보면 된다. 전기는 하루에 3∼4시간 쓸 수 있었고 사탕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먹었다. 채소도 떨어지고 고기는 구경하기 어려웠다. 지방에 비해 평양은 통제가 매우 심해서 8시간 노동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장사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추방당하면 생땅에 가서 터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추방되지 않으려고 명색을 유지해야 한다. 세대주들은 체크를 하니까 여자들이 직장을 그만두고 장사에 나섰다.

‘쌀은 곧 사회주의’인데 배급이 어려워지니까 배급제를 유지하기 위해 시민의 수를 줄여야 했다. 위에선 수도를 옮기겠다면서 규모를 축소시키라고 했다. 힘없는 사람들이 추방대상이 됐다.

◇ 북한의 여성지위 = 여성들의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탁아를 비롯한 정책을 실시한 것은 큰 성과다. 그렇지만 노임이 반드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남존여비의 관습은 그대로다. 여전히 여성성/남성성 구분은 굳어져 있고 관습은 ‘여자가 왜 세게 나가나’하고 제동을 건다. 가사일 분담이 전혀 안 돼 있어서 여성들은 탄 때고 나무 때고 물길어 빨래하고… 무쇠처럼 일한다.

‘여성존중’이 뭔지 모른다. 절대적으로 한쪽 수레바퀴(남편과 아들 위주)로 굴러가는데 지방이 더 심하다. 평양에선 외국 다니면서 문화적 쇼크를 받고 ‘여성을 대우해주는 것이 문명한 것’으로 인지하는 사람들도 몇 있다. 그렇지만 ‘조선여성의 미덕’‘여성의 본분을 지켜라’ 소리는 여전하다. 최근엔 식량난 겹치면서 여성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기 때문에 남아선호사상도 빛이 바래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 성적 학대 = 여기서 ‘북한에도 성폭력 문제가 심각하지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무슨 성폭력이 있나. 감시가 얼마나 심한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성폭력에 대한 개념이 잡혔다. 먼저 내가 겪었던 성폭력이 떠올랐으니까.

성폭력에 대한 제재가 없어서 더욱 문제다. 성 상납도 많지만 그것이 성 학대라는 인식이 부족하다. 국경지대에는 인신매매도 많이 일어난다. 중앙당에는 외국인용 사창가가 있고 그 외에도 간부들이 엘리트 여성들을 사무실이나 집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조이 여울 기자 cognat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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