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중학교 때 체육선생님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아니 아무리 중학생이지만 나도 그렇고 아이들도 어쩌면 그렇게 순진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무지로 인해서 얼마나 직·간접적인 피해상황에 노출돼 있었단 말인가. 이제 웃음이 멎고 슬슬 열을 받기 시작하는 건 그 사람이 우리의 순진함을 이용해먹었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그 체육선생님은 상습적인 성추행, 성희롱범이었다. 그런데 우린 지금 당하는 건지 아닌지 계속 헷갈려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선생님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변명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우린 수업시간 한 시간 동안 운동장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앉아 그 선생님의 부부생활에 대해서 한참 설명을 들어야했다. 양기가 빠져나가면 어떻기 때문에 자신은 부인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며 남자는 양기가 충만하려면 어쩌고저쩌고… 그리고 나서 말했다.

“질문 있나?”

무슨 얘긴지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아이들을 두고 뭐 자연스러운 거라는 둥 물어볼 거 있으면 다 물어보라는 둥 히죽히죽 웃었다.

여름의 체육시간. 지구들기를 하고 있었다. 등을 활처럼 휘게 해서 손과 발을 동시에 땅에 붙이게 하는 일종의 스트레칭인데 매트를 깔아놓고 여러명에게 동시에 지구들기를 시켰다.

그렇게 30초인가를 버티는 것이 실기시험 점수에 들어갔는데 여름이라 아무리 체육복을 제대로 해도 배꼽이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이 선생은 애들에게 가까이 와서 배를 치거나 배꼽을 찌르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그리고 나서는 애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항의하면 장난 친 거라고 했다.

우리학교 여름 체육복이 거의 핫팬츠였는데 이 선생님은 요즘 중학생들 발육이 좋은데 저렇게 짧은 팬츠를 입혀놓으면 남녀공학 같으면 사고를 쳐서 안된다느니, 여학교여도 이러면 위험하다느니 하는 말들을 수업시간에 하면서 별 생각없던 애들을 수치심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수업이 끝나기 전에 모두를 모아놓고서는 그런 걸 가지고 선생님에게 뭐라고 한다면 너희가 이상한 거라는 식으로 한참씩 설교를 했다. 게다가 항상 이런 얘기할 때만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얘기를 하면서 각종 인생얘기를 겸하기 때문에 애들은 또 헷갈리는 거다. 불쾌한 느낌을 받건 아니건 간에.

사실 선생님이 그런 식으로 장난을 쳤더라도 그냥 애들끼리 얘기하다가 기분나빴다고 하거나 아니면 집에 가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하거나 그러다가 문제를 느낄 수도 있었을텐데… 그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선수를 치면서 우리 입을 막았던 것이었다.

여드름이 많이 났던 나를 불러서는 “생리는 제때 하나? 생리랑 여드름은 상관이 있다”고 하면서 생리에 대한 얘기를 잔뜩 늘어놓기도 했지. 당시 중학생들에게 생리는 친구들끼리도 잘 얘기하지 않는 일종의 터부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이 일부러 수치심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교무실에서 그런 식으로 떠들어댔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살포시 웃고 인사하고 나왔다. 우리는 다들 헷갈리고 있었던 거다. 그 선생님은 끝없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설명했기 때문에(그것도 공개적으로) 우리는 도무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작은 변화가 생겼으니 그것은 익명의 투고가 선생님 집에 도착한 것이다. 한 학생이 선생님이 아이들을 성적으로 만지고 기분나쁜 농담을 하는 것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항의하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선생님의 반응이 또 걸작이었다. 그 편지에 대해서 교무실에서 온동네 다 떠나가라 떠들고 다니더니 교실에 들어와서도 그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도리어 우리들을 추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 내가 니들을 성적으로 만진 적이 있니? 있으면 지금 얘기해라. 내가 말이지, 성적으로, 그러니까 성적으로 만진 적이 있으면 지금 여기서 얘기를 하면 내가 인정을 하지.”

선생님이 너무 진지하고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면서 얘기하자 애들은 또 헷갈리기 시작했다.

뭔가 기분 나쁘다고 느꼈던 아이들도 ‘성적으로 만지는 것’이 뭔지 구분이 안가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당연히 아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뭐 행여 그 상황에서 말을 할만큼 배짱좋은 아이가 있었다 치더라도 그 선생님은 또 ‘성적으로 만지는 것’이 어떤 건지 설명한다는 명목으로 노골적인 얘기들을 늘어놓아서 순진한 애들을 또 헷갈리게 만들었겠지. 그리고 주야장천 입담도 좋은 그 선생님 말을 따라가다 보니 그 편지를 쓴 아이가 뭔가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데다 성격 나쁜 이상한 아이인데다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다.

“내가 지문을 채취하는 법을 알아! 여기 우표에 묻은 지문을 채취해서 전교생 지문을 찍어서 조회할 거다. 누군지 당장 나와! 퇴학당하기 전에 자진해서 내게 찾아와라. 혼내지 않는다. 그냥 얘기만 하려고 하는 거다.”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은가. 내가 저건 정말 거짓말이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지문조회는 아무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 누누이 얘기를 했건만 아이들은 이미 선생님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곧 있을 지문조회로 인해서 잡힐 범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하튼 졸업한 이후에도 악평이 떠도는 걸 보면 그 인간 그 이후에도 그렇게 사는 모양이다. 알만큼 알면서도 침묵하는 교무실 분위기도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간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쟁이들이 가해자가 되는 건지, 가해자가 되면 거짓말이 느는 건지. 어쩌면 저렇게 당당하고 할 말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아무튼 ‘진정한 성폭력이 뭔지’는 가해자들이 다 아는 척이라니까.

금오 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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