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현지 처’ 두는 한국 성문화 충격

여성신문은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WAW)가 주최하는 ‘소수자의 시선으로 북한 만나기’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거주하고 있는 북한여성들의 진솔한 목소리를 통해 가깝고도 먼 ‘북한여성의 삶’을 조명·연재한다. <편집자주>

아무개씨- 1997년 2월 탈북했다가 2000년에 다시 북한에 잡혀 들어갔다 재탈북했다. 북한에서 판매원, 선동원으로 일했다.

◇ 판매원의 역할은 = 북한에는 상업관리소가 도·시·군 별로 있는데 식료품 상점과 공업품 상점을 관리하는 곳이다. 상업관리소에선 공장기업소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모두 인수해서 그것을 상점에 내보내는 일을 한다. 판매원은 말 그대로 제품을 판매하는 역할을 하는데 전부 여성이다. 1993년도에 일했을 때만 해도 생산되는 제품들이 없어서 판매할 것이 없으니까 멍청하게 서 있어야 했다. 부업으로 못쓰는 땅을 일궈서 얻어지는 수확을 목장 가축사료로 쓰고 술도 뽑고 식료품 공장에 보내 보탬을 주기도 했다. 판매하는 일보다는 퇴비 주는 일을 더 많이 했는데 똥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밭에 뿌리는 것이다. 이런 일 하다가 판매원 그만 두고 목장에 가서 일했다.

◇ 선동원은 무슨 일을 하나 = 선동원의 역할은 사람들의 사상이 변질되지 않게 선동하는 것이다. 소위 비사회적인 행위를 한다고 하는데 그 행위라는 게 뇌물작전을 쓴다거나 외제를 사용한다거나 종업원들의 부인들이 술을 만들어 판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또 김일성 회고록을 한 부분 읽고 여기에 기초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겠는가 얘기한다. 예를 들면 ‘지금 미제가 우리를 고립시키고 식량 못 들어오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서 살아야겠는가’를 논한다. 지각을 한다든지 생활총화에 참가를 안 하는 사람에 대해서 비판도 한다.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는 거다. 선동원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한다.

◇ 탈북하기 직전의 상황은 = 목장 일이 워낙 힘들었다. 염소방목도 해야 하고 밭에 가서 일도 해야 하고 사람들 분위기도 다 죽고 일을 하겠단 사람도 없었다. 우리 집은 워낙 가난했는데 부모님이 생각다못해 내게 올라오셨다. 뭐 먹을 게 없는가 하고 오셨는데 어떻게 그냥 보낼 수 있겠나. 염소젖 짜는 날에 맞춰서 부모님께 조금씩 보내드리곤 했다. 관리소에서 이제는 식량 공급 못하겠다면서 알아서 먹으라 했는데 더는 안 되겠구나 싶어 사표를 냈다. 원칙은 내가 다음 갈 기업소에서 파견장 같은 걸 받아와야 이 곳에서 보내주는데 당시는 굶어죽는 사람들 많았으니까 기업소들도 별로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1997년 나올 때까지 사실 난 사상에 투철했던 사람이라 중국에 올 마음이 없었다. 넘어오기 직전에 5일간 굶은 적 있었다. 그러다 어떤 아줌마를 만나서 넘어오게 됐다.

◇ 돈을 버는 사람도 생기지 않았나 = 굶어죽는 사람들 많을 때 죽지 않고 견뎌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장사를 한 사람들이다. 중학교 4학년 다닐 때 동네에 어떤 사람이 손수레에 구리를 가득 싣고 있는 것을 파출소에서 회수해 가는 걸 봤다. 그 때는 ‘저 사람은 구리를 왜 저리 많이 모아놨대?’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시기에도 눈이 좀 트인 사람들은 그런 장사를 한 거다. 중국 변두리에 가면 엄청나게 큰돈이다. 또 해안 지역에서 해산물을 갖다가 평안도 가서 팔고 거기 쌀을 다시 해안지역에서 팔고 했던 사람들도 있다. 그때부터 그런 식으로 깔아놨던 사람들이 김일성 죽고 난 다음에도 일어설 수 있었다. 그저 월급 받고 고지식한 사람들은 밑천이 없으니까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거다.

◇ 북한에 잡혀갔다 나왔다는데 = 2000년도에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북한에 넘겨졌다. 교도소에서 2∼3개월 있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방북 앞두고 김정일 위원장이 특별사면을 해준 기간이 있었는데 잘 들어맞았다. 때리지 말고 옷이나 돈도 회수하지 말고 집 주소만 확인되면 그 자리에서 보내라 했었다. 감옥 왔다가 일주일만에 나간 사람도 있었다. 대사관 사건 터지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특별히 중국에서 남조선 스파이질을 하지 않은 이상 감옥에서 1년을 넘기지는 않는다.

◇ 2000년도 북한의 변화한 모습은 = 지금은 많이 개방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엔 상점이라 해도 진열된 상품이 한심했다. 지금은 중국상품들이 거의 다 있는 것 같다. 요즘은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투자해서 중국상품 들여오고 남은 이윤 중에 70∼80%를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갖는다. 판매원들이 서로 상점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다. 거기 들어가면 시집 갈 준비 다 하고 나온다고 한다. 그런 곳은 국가에 바치는 게 있으니까 판매할 수 있다. 식당도 거의 다 개인이 하는 거다. 그러나 시장에서 외국상품 파는 사람들은 안전원들에게 파리 쫓기듯이 쫓긴다. 하는 수없이 그 사람들은 나진·선봉 같은 데서 구입한 물품을 공업품 상점에 도매로 넘기기도 한다.

◇ 북한사람들의 남한에 대한 인식 = 사람들의 변화에 나도 놀랐다. 시장 나가면 살짝 다가와 귀에다 대고 “남조선 화장품이요∼”라고 한다. 대중 속에 들어가 보면 옷도 한국 게 좋다는 식의 말이 흘러 들어온다. 밀수 통해서 물품이 들어온다. 상표는 끊고 오지만 그런 일 하는 사람들은 딱 보면 중국 건지 일본 건지 한국 건지 안다. 문화도 많이 들어와 있다. 아는 동생이 ‘찰랑찰랑’이나 조용필의 ‘Q’를 부르면서 동무들도 다 안다고 하더라. 한국에 대해서 인식이 많이 바뀐 거다.

◇ 나진·선봉 경제특구의 모습 = 나진·선봉지역은 다 개방해서 외국인들 상대 많이 하고 거의 중국과 다름없다. 나진은 평양처럼 승인번호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게 돼 있다. 그렇지만 가서 보니까 누구든 뇌물 끼면 통과할 수 있다. 장사꾼들이 나진·선봉에서 봉고차 타고 다니면서 장사한다. 나진이나 국경지대는 일반 사람이 맘대로 거주하지 못한다. 시집을 가게되면 모를까. 개방되면서 국가에서 파견하거나 빽있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다른 지역과 생활수준 차이가 많다. 급여도 일반 도시 근로자들보다 수준 높다. 평양보다 낫다고 봐야할 정도다.

◇ 중국서 사업을 잘 했다고 하는데 = 탈북한 여성들은 80∼90%가 인신매매 당해서 남자들에게 팔려간다. 나와 같이 나온 여성이 있었는데 당장 이곳에선 우리에게 시집을 가라고 했다. 여자들은 일단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시집을 간다. 그러다 뛰쳐나오는 경우도 많다. 나는 죽어도 시집 안간다고 하면서 일자리를 찾아달라 했다. 중국 와서 한 달만에 시내 한국의상 도매하는 곳에 들어가게 됐다. 한국말도 빨리 익히고 한국TV와 신문도 읽었다. 식당 일도 하고 호텔 일도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다보니 일 제안도 많이 들어오고 잘 되었던 것 같다.

◇ 한국문화 접하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 ‘성’에 대한 것이다. 중국서 조선족 사람이 한국인 사장에게 나를 소개시켜줬는데 이튿날 사장이란 사람이 나보고 술 마실 줄 아느냐고 얘기 좀 할 겸 나오라 했다. 노래방에 들어가서는 한다는 말이 ‘앞으로 이런 데 다닐 생각 하지 말라’나. 이런 데 들어오면 버린댄다. 그리고는 얘기하는 게 빙빙 둘러대면서 ‘친한 남자친구 있었냐’는 둥 묻더니 자기애를 낳아달라는 말을 하더라. 부인이랑은 헤어질 거라면서. 이 사람 정말 정신 나갔구나 싶어서 ‘안됩니다!’ 잘라 말했다. 사실 나를 모독하는 것 같았다. 후에 살면서 보니까 중국 흐름도 그렇고 애인관계(현지 처)로 두는 게 많더라. 북한에선 마누라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 만났으면 만났지 애인이란 것 자체가 없다.

◇ 한국에 어떤 기대를 하고 왔나 = 중국서 잡혔을 때 가서 죽이지만 않는다면 다시 나와서 한국 가는 걸 택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가정환경과 신분토대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집요하게 달라붙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무엇을 하겠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성공한 사장이 될 거다. 그래서 북한의 최하층의 사람들을 돕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정리=조이 여울 기자 cognate@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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