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jpg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다.”“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지난 1970년 11월 13일 청년 전태일이 스스로를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횃불로 불사르며 외쳤던 피맺힌 절규다. 모든 노동자 정신의 바탕이 된 전태일, 그의 절규는 32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들 가슴 속에 뜨겁게 고동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 노동이란 무슨 의미인가. 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 장시간 일하지 않고도 만인이 편안할 수 있는 선에 이르는 길은 없는가.

우린 지금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고도로 문명화된 지식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런 화두에 마땅한 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삶의 질을 논하는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여전히 힘겨운 노동과 고단한 일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32주기를 맞아 오빠와 어머니의 뒤를 따라 노동현장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여동생 전순옥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부터 한국노동운동사를 집대성하는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러나 그는 변치않는 노동자다. [사진:이기태]

<편집자 주>

냉전시대의 논리가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탓일까.

우리 사회는 모든 일하는 사람을‘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보다는 완곡한 ‘근로자’라 표현하는 데 익숙하다.

“우린 사실 다 노동자잖아요. 우리 사회는 노동자를 어떤 특별한 집단처럼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심지어 석박사 노조, 공무원 노조까지 생길만큼 노동자란 이름이 보편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있어요. ”

전순옥씨는 교수, 학자로서의 삶보다는 자신은 그저 자연스러운 노동자요, 여성이요, 한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오빠의 뒤를 이어 중학 시절부터 노동현장에서 치열한 삶을 살아왔던 그가 교수로 또 학자로 불리워진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질 않다. 무엇보다 자신이 지금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영세사업장, 그 사각지대에서 힘겨운 삶을 연명해가는 노동자들의 고단한 이야기,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삶이요, 오빠의 삶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는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노동자로서 당당히 위치짓지 못하는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32년 전 오빠 전태일은 그가 평소 가장 마음 아파하고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불태웠어요. 전태일의 정신은 많이 알려지고 계승돼 온 건 사실이지만 왜 그가 죽었는지, 노동자의 삶은 그 후로 얼마나 바뀌었는지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싶어요.”

그가 바라보는 21세기 오늘의 노동현실은 오빠가 살았던 수십 년전 청계청 통일시장의 그것과 별반 다름이 없는 데 말이다. 다만 다락방이 사라지고 10대 여공들이 사라졌을 뿐. 그 자리는 중국과 제 3세계 노동자들, 그리고 30,40대 여성들이 12~16시간의 고된 노동을 대신하고 있다.

오빠의 깊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내가 여성으로 살면서 받은 억압과 착취를 깨닫게 되면서 그 전에 내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 지금에 와서 알았어요.”

오빠의 분신 이후 스스로 공장노동자의 길을 택한 16살 순옥에게‘몇번 시다’로서의 이름과 푸대접, 그리고 구치소에서 보안사로 군사정권의 연이은 고문행위 등은 그에게 참을 수 없는 모멸감, 증오, 분노 그 이상을 주었을 게다. 그러나 그는 그 서럽고 눈물겨운 삶을 살면서도 어떤 증오나 분노를 마음속에 똬리 틀진 않았다. 오히려 그로부터 자신은 충분히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 근거와 교훈을 얻은 탓이다.

무엇보다 오빠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었고 그의 삶에 누가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캄캄한 암흑세계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는 보다가 더 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죽어서 그 캄캄한 암흑 세계에 작은 구멍을 하나 낼 테니까, 내가 죽으면 노동자와 학생들이 모두 힘을 합해 그 창구멍을 넓히는 데 힘을 보태주세요. 어머니가 이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나를 지금까지 키운 것이 위선이 되는 거에요. 위선자가 되지 말고 꼭...’

전태일 열사가 숨을 거두기 직전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남긴 말이다. 피를 토하며 남긴 아들의 간곡한 부탁을 어머니는 또 순옥씨는 들었다.

“오빠는 일기와 편지에서 어린 10대 시다들이 지옥같은 노동의 현장에서 날마다 죽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하루 종일 이것을 보아야 하는데 이것이 나에게는 너무 큰 고통’이라고 썼어요. 그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생명체들을 살려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골똘했던 거에요. 그래도 안되니까 죽음을 택한 것이구요.”

그는 ‘나이 어린 오빠의 어디서 그런 깊은 사랑이 나올 수 있었을까’지금도 감탄한다고 말했다. 철야다 야근이다 노동운동으로 늘 시간에 쫓기면서도 동생들에 대한 사랑도 지극해 오빠는 틈만 나면 순옥씨 삼남매를 앉혀놓고 자신이 읽은 책 이야기며 평화시장의 공장에는 12살 먹은 아이가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14~16시간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줬다고 했다. 그렇게 일하지 않고도 회사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도 오빠는 말했단다. 노동자의 지위는 물론 복지도 개선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순옥씨는 오빠가 왜 그날의 결행을 하게 됐는지 알았다고 했다. 일찍이 재단사였던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노동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아버지 당신은 노동운동에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 켠은 불안한 마음으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넌지시 말씀하셨다고 한다.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보면 마음이 아파 견디질 못했다던 아버지의 성정을 오빠는 누구보다 쏙 빼닮은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 세상에 큰 화두를 던지게 한 동인이다.

“12일 아침 출근하는 오빠에게 등록금을 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저는 야간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지요. 오빠는 며칠만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게 마지막 대화였죠. 그날 밤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어려울 때마다 삶의 지침됐던 <전태일 평전>

바깥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결행한 영국 유학길에도 오빠는 늘 따라다녔다. 우리 언어가 아닌 다른 말로 공부를 하는 것이 힘겨웠고 매 고비마다 꺼내 본 <전태일 평전>은 그로하여금 늘 새로운 다짐을 하게 했다. 초등학교 졸업이 그만이었던 오빠가 공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것을 떠올리면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면 내 나라, 내 모습이 더 잘 보이는 걸까. 그는 영국에 가서야 지난 70년대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깊이 천착할 수 있었다. 자신도 경험했던 것처럼 한국의 경제성장은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이들 노동자들로부터 촉발된 노동조합 운동은 자신이 미싱처럼 제품을 생산해 내는 기계가 아닌 한 인간임을 인식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동일방직, 원풍, 반도상사, YH로 이어지는 70년대 노동조합 운동의 선두에 섰던 여성노동자들은 우리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던 민주노조의 시발이요 큰 성과물이었다. 그는 박정권 시절 노동자들은 어떤 노동조건에서 일했고 억압적인 노동정책에 어떻게 저항했는가 이런 내용을 토대로 한 논문 < 한국의 경제성장의 값은 누가 치루었나(석사)> <70년대 한국 여성노동자와 그들의 민주노동조합운동을 위한 투쟁(박사)>으로 영국의 워릭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논문은 연구방법이 남달랐다. 그는 논문에 절대로 통계를 담지 않는다. 다만 6,70년대 당시 산업 노동자 450명을 찾아내 그들의 직접적인 육성을 담아냈다. 일종의 구술사인 셈이다. 영국에서는 이 논문에 대해 한국에 관한 더없는 소중한 자료로 판단, 논문 심사위원들이 출판의 길까지 터준 상태다.

내가 행복해야 주는 즐거움이 더 큰 법

그는 지금 성공회대에서도 역시 100여명의 노동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노동운동사에 깊이 접근하고 있다. 사각지대로 남아 있는 영세사업장에 대한 연구도 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영세사업장은 명확한 데이터가 존재하질 않는다. 그는 이미 종로, 동대문, 창신동 성북동 태릉쪽 영세사업체 1,600여개의 공장을 파악했다. 그가 조사한 공장은 어이없게도 전혀 노동부에 등록돼 있지 않다. 정책입안자도 모르고 노동부 조차 모르는 사실이다.

“지난해 공장에 가서 일해보니 지금도 혹사시키고 있는 것은 똑같아요. 근로환경이 영세사업장은 절대 변함이 없어요.”

통일상가,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청피노조 사람들이 외곽지대로 나오면서 당시 일했던 재단사들이 대부분 하청에 하청을 주는 어려운 조건이기 때문이다. 공장주가 개선을 하려 해도 구조적으로 개선이 힘든 상황이란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우선 제 실상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 돼야 한다고. 열악한 근로조건이 파악된 연후에 해당 지역노동자들이 편히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고 함께 대안을 마련해 보겠단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또 있다. 우리나라의 의류산업이 과연 사양산업인가 하는 대목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옷 잘 입는 사람들로 정평이 나 있는데, 중국에서 제작하고, 우리나라 기술자도 다 없어진 상황이라면 우리나라사람은 필경 비싼 옷을 사 입어야 한다는 결론인 탓이다. 따라서 그는 의류산업의 전반적인 구조에 대해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연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동운동 별 거 아니에요. 노동자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