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 교수, 아프리카 방문만 60번 이상
마을 지도자 육성 최우선
아프리카에 무상 정수기 보급 계획도

김장생 연세대 교수가 23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김장생 연세대 교수가 23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카페에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06년 처음 아프리카에 갔을 때 우간다에서 1년을 살면서 이들이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는 원대한 계획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올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지역 사람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김장생(44) 연세대 인문예술대학 교수는 2006년부터 지금까지 60번 넘게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동남아시아를 찾아 빈곤 탈출을 위한 지도자 양성 활동을 해오고 있다. 철학을 전공했지만 지금 그가 가르치는 분야는 국제구호 현황과 빈곤 실태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한 고(故) 김용기 장로의 손자다.

 
- 아프리카의 가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어머니가 새벽 4시부터 11시까지 가나안농군학교 식당에서 고생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봤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의 사명감과 역사의식에 거부감이 들어 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독일로 유학을 갔다 2006년 귀국했습니다. 그때 가나안농군학교 교장이던 아버지가 우간다에서 열리는 국제컨퍼런스에 저를 통역으로 부르셨어요, 우간다 대표단이 저를 초청해 1주일을 더 머물었는데, 그때 고통의 실체를 봤습니다. 철학을 전공하며 어거스틴이 말한 고통의 문제를 고민해왔는데, ‘바로 옆집에서 굶어죽고 콜레라, 이질, 설사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바로 고통’이라는 걸 깨달은 거죠. 현지에서 생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우간다 시골마을에서 1년을 생활했습니다.”

김장생 교수가 우간다 개척자 마을에서 마을 주민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
김장생 교수가 우간다 개척자 마을에서 마을 주민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본인 제공

-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지내셨나요.

“병도 많고 위험한 데 너무 무작정 갔던 것 같습니다. 부족장으로부터 ‘마토브’라는 이름을 받았는데 말라리아, 이질, 설사 등 각종 병에 걸려 1년 중 태반은 누워있었습니다. 오히려 민폐를 끼친 거죠. 그렇게 지내면서 빈곤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고 삶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국제사회 원조가 많은 데 왜 아프리카 빈곤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까.

“2차 대전 후 현재까지 정부와 민간을 합해 1조500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원조가 아프리카 대륙에 제공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말라리아에 걸리지 말라고 모기장을 사주면 주민들은 다음날 시장에 나와 5달러에 팔거나 결혼식 때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말라리아에 안 걸리는 것보다 당장 돈벌이에 더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원조 이후 거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놀라운 평가가 1995년 나오기도 했습니다. 나이지리아 원조금의 3분의 1이 빼돌려져 스위스 은행으로 입금되었다는 말도 있고요. 아프리카는 7~8%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대륙인데 인구가 집중된 농촌지역은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는 극소수에만 집중된 거죠.”

-국제원조들이 효과가 없었던 것인가요.

“원조 효과는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국제사회에서 정한 지표들이 있습니다. 가장 좋았던 것은 ‘AIDS 감소 프로젝트’로 콘돔을 무료로 나눠주면서 실제 AIDS가 많이 줄어드는 효과를 거뒀습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콘돔 원조가 중단되자 AIDS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나이지리아에 수도를 놓아준 일입니다. 여성들이 매일 아침 6시에 10리터 물통을 들고 물을 뜨러 가 저녁에 돌아오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무거운 물통을 지고 다니고 흙탕물을 길어오기 때문에 콜레라 등 병에 걸립니다. 그래서 수도를 놓아주는 공사를 진행하는 데 자꾸만 수도관 파이프가 없어지는 겁니다. 처음에는 남자들이 가져가나 했는데 여자들이 파이프를 숨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물을 뜨러가지 않게 되면 수다를 떨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현지 문화에 대한 고려 없이 물자를 주는 것은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현지 지도자 양성 위주의 활동을 하신 건 그때문인가요.

“네. 마을 사람들이 마을의 문제를 고쳐야 하는 주인공이고 저는 스태프 역할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배우고 들은 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농군학교 정신이 주체적 사유를 가진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5시에 일어나 다 같이 구호를 외치고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협동조합도 만들고, 닭도 키우고 재봉틀 교육도 했습니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마을을 ‘개척자 마을’로 불렀습니다.”

-개척자 마을 방식은 성공했는지요.

“탄자니아의 존 보스코라는 젊은 청년이 2007년 농군학교에서 함께 생활하고 갔습니다. 이듬해 탄자니아를 방문하니 새벽에 그 친구 혼자 뛰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제정신이 아니라며 그의 멱살을 잡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갔더니 마을 청년들이랑 학교를 짓고 있었고, 나중에는 20평 되는 방을 만들어 아이들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양계장을 만들었고, 학부모들과 협동조합도 만들었습니다. 마을에 은행도 생겼습니다. 존이 마을 리더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고(故) 김용기 장로님께서 설립하신 가나안농군학교는 어떤 곳인가요.

“조부이신 김용기장로는 1926년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들어갑니다. 만주에서 생활하며 독립운동은 먼 곳이 아닌 지역사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지역공동체운동(‘이상촌’)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면서 독립운동가를 길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6.25가 끝나고 1954년부터 정신교육을 시작합니다. 가나안은 팔레스타인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여기에 빈곤과 싸우기 위해 농군(농사+군대)의 정신을 도입한 것입니다. 새벽 4시30분부터 구호를 외치고 4킬로에서 최대 12킬로까지 마을을 뛰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정신을 갖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우리 가족끼리 시작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참여해 학교가 됐습니다. 교육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직접 쌀을 들고 와 일주일이나 석달까지도 저희 집에 지내며 농사도 짓고 함께 생활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한 소녀가 김장생 교수가 설립한 정수기 회사에서 개발한 정수기에서 걸러진 물을 들어보이고 있다. ⓒ 본인 제공
아프리카의 한 소녀가 김장생 교수가 설립한 정수기 회사에서 개발한 정수기에서 걸러진 물을 들어보이고 있다. ⓒ 본인 제공

-올해 ‘빈곤과 권력’을 변역해 책이 출간됐는데 어떤 책인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책을 번역합니다. 이 책을 요약하면 빈곤한 사람은 권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곤한 사람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에게 권력을 줘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권력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게 됩니다.”

-빈곤과 권력 뿐 아니라 여성과 빈곤, 여성과 권력의 문제도 큽니다.

“많은 나라에서 여성은 약자여서 교육에서 소외돼 왔습니다. 볼리비아에서는 여성들이 투표할 권리가 없었는데 여성운동이 일어나 투표권도 얻고 마을회의에서 발언권을 가지게 됐습니다. 거대한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국내에서 벌어지는 페미니즘 운동도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페미니즘은 결국 휴머니즘이며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요.

“연세대 학생과 사회적 기업으로 정수기 회사를 차렸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흙탕물을 마시기 때문에 3억 명이 수인성 질병에 걸려 고통 받습니다. 제가 만든 정수기는 손잡이만 돌리면 물이 깨끗해지며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년 4월부터 양산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3000만개의 정수기를 생산·보급하면 전 세계 수인성 질병이 사라집니다. 대형 정수기회사에서 큰 정수기를 10대 팔 때마다 2만원 짜리 저희 정수기를 사주는 식으로 후원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미국에서는 산악용으로 이 정수기를 좀 더 비싼 값에 팔 생각입니다. 이렇게 돈을 모아 아프리카에 정수기를 무료 보급하려 합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두 달 씩 아프리카에서 생활하는 그는 “비용 마련을 위해 달걀을 팔았는데 망했다”며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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