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심석희
4년간의 성폭력 피해 고발
한 팬의 편지에 공론화 결심
온라인에선 응원·연대 쏟아져
조재범 전 코치는 전면 부인

지난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1000m 예선 경기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심석희 선수가 손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2월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여자 1000m 예선 경기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심석희 선수가 손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려 돌아온다.” 미국 여성 체조선수 156명에게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래리 나사르 전 코치를 향해 ‘생존자’ 카일 스티븐스가 법정에서 외친 말이다.

스티븐스의 말은 한국에서도 유효하다. 올림픽 3관왕을 하고 ‘쇼트트랙 황제’로 불리며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선 순간, 심석희 선수는 수년 간 자신을 괴롭힌 코치의 만행을 고발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불과 한 달 앞둔 시기였다. 운동선수로서 목표를 이루고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자신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까지 참고 견딘 심 선수는 내내 숨겨야 했던 비밀도 드러낼 수 있었다. 그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계기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모습에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심 선수는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조재범 전 코치의 상습 폭행을 고발한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 선수는 8일 “조 전 코치가 2014년부터 성폭력을 일삼았다”고 밝혔다. SBS <8시뉴스>는 이날 “심 선수가 성폭행이 시작됐다고 밝힌 2014년은 심 선수가 고등학교 2학년 때로, 4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조 전 코치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다.

앞서 조 전 코치는 지난해 1월 훈련 중 심 선수를 주먹으로 수차례 때려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히는 등 2011년부터 2018년 1월까지 4명의 선수를 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수원지법은 지난 9월 심 선수를 비롯한 국가대표 선수들을 상습 폭행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조 전 코치에게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조 전 코치의 항소심 판결 선고는 오는 14일 열린다. 심 선수가 조 전 코치를 성폭행 혐의로 추가 고소한 것은 지난해 12월 17일 항소심 2차 공판이 열린 날이었다.

언론 보도에서 심 선수는 특히 국제 대회 출전을 앞두고 있거나 대회가 끝난 뒤에도 범행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조 전 코치가 범행 때마다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느냐”는 협박과 무차별적인 폭행에 시달렸다고도 털어놨다.

심석희 선수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혐의를 받는 조재범 전 국가대표팀 코치가 지난해 6월 경기 성남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으로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심석희 선수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혐의를 받는 조재범 전 국가대표팀 코치가 지난해 6월 경기 성남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으로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심 선수의 변호를 맡고 있는 법무법인 세종은 입장문에서 “심 선수가 만17세 미성년자이던 2014년경부터 조재범(전 코치)의 무차별적 폭행과 폭언, 협박 등을 수단으로 하는 성폭행 범죄를 상습적으로 저질러왔다는 진술을 듣게됐다”고 밝혔다.

심 선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4년 동안 드러내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세종 측은 “피해 사실이 밝혀질 경우,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평창올림픽을 앞둔 국가대표 선수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 견뎌야 할 추가 피해와 혹시 모를 가해자의 보복이 너무나 두려웠고, 자신만큼 큰 상처를 입을 가족들을 생각해 최근까지도 이 모든 일을 혼자서 감내해왔다”고 밝혔다. 조 전 코치가 범행 때마다 “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없느냐”고 협박을 했다는 설명이다. 위계가 분명하고 서열 문화가 강한 스포츠계에서 성폭력 피해를 드러내기 어렵고, 폭로를 하면 역공을 당하거나 진로가 막힐 위험이 매우 높다. 체육계 ‘미투’가 확산되지 못한 이유이기도하다.

심 선수의 변호를 맡고 있는 임상혁 변호사는 “이런 (성)범죄가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누적적으로 상습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본인에 대한 상처는 말할 수 없이 많이 누적돼 있고 고통은 매우 심한 상태”라고 심 선수의 상황을 전했다.

심 선수가 고심 끝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한 팬이 심 선수에게 보낸 편지 한 통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심 선수의 변호인 조은 변호사는 이 뉴스에서 “심 선수가 심하게 폭행을 당했음에도 올림픽이든 그 이후에든 선수 생활 열심히 하는 걸 보여주는게 자기한테는 너무 큰 힘이 됐다면서 고백을 하는 편지를 주셨는데, (심 선수가) 자기로 인해 누가 힘을 낸다는 걸 보고 밝히기로 결심했다 들었다”고 말했다.

심 선수의 주장에 대해 조 코치는 “성폭행 혐의는 전혀 말도 안 된다”며 혐의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경찰은 조 전 코치의 휴대전화와 태블릿PC 등을 압수해 분석하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어렵게 용기 낸 심 선수를 향한 응원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결코 쉽지 않았을 결정을 한 심석희 선수, 연대하고 지지합니다” “심석희 멋지다, 응원합니다”, “용기내 준 심석희 선수 대단하고 끝까지 지켜주고 싶다”, “심석희 선수의 결단과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등의 글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어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응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9일 민주당 확대간부회의에서 “참혹한 피해와 고통을 견디고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그 분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감사하다”며 “미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법부는 정의롭게 응답해야 한다. 향후 입법 활동은 당과 국회가 조속히 챙기겠다”고 말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조재범 코치를 강력처벌 해주세요’( http://me2.do/GVYxhrxw)라는 제목의 청원이 진행 중이다. 방송 시작 직전 7000여명이든 참여 인원은 9일 오전 13만7898명으로 빠르게 늘었다.

한편, 대한체육회가 한남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실시한 ‘2018년 스포츠 (성)폭력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국가대표 선수가 경험한 성폭력 피해 비율은 1.7%로 2016년 1.5%에서 증가했다. 이는 국가대표 강화훈련 참가 선수와 지도자 791명을 대상으로 전수 조사를 벌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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