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jpg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는 세 명의 여자가 서로를 닮아가며 서로의 가슴속에 파고들며 서로의 목소리에 휘감겨든다. 세 명의 여자는 이렇게 서로 속삭이며 자신들이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을 지니고 산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서늘한 위무를 한다. 영화는 1923년 리치몬드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LA에서 지극히 평범한 남자의 아내로 살고 있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에 거주하는 출판 편집인 클라리사의 ‘하루’를 기묘한 방식으로 연결시키면서 울프식 세밀함으로 무의식과 반의식의 차원에서 새로운 ‘댈러웨이 부인’을 써 나간다.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죽게 할 것인지 살게 할 것인지를 두고 홀린 듯 골똘히 생각 중이고,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는 임신 8개월의 로라는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을 옆에 두고 자살 충동에 사로잡힌다. 에이즈의 감옥에 갇힌 지 이미 너무 오래된 옛 연인 리차드가 창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한 후 클라리사는 그가 앓았던 모든 상실의 원형인 그의 어머니 로라를 만난다.

“나는 죽기 위해 호텔에 갔었지만 끝내 죽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둘째 아이가 태어난 후 집을 떠났던 거예요.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습니다. 나는 살기 위해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두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간 어머니의 변명이라고? - 영화는 이렇게 윽박지르지 않는다. 영화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이름의 우울증에 대해, 이 포착하기 어려운, 그러나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모든 언어 너머에, 어쩌면 가장 메마르고 가장 깊은 우물 속에 자리잡고 있는 여성의 증상에 대해, 그 우울증의 직포로 짜여진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고요한 응시를 보낸다.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네들의 깊디깊은 어두움의 소리에, 귀를 넘어 단번에 푸르디 푸른 무덤 위로 쏟아져 내리는 메마른 비탄에 선의의 물음표를 남긴다. 이것은 현대문학의 ‘현대성’ - 내러티브의 통합적 연쇄를 어긋남과 틈새의 혼돈으로 바꿔버린 - 을 최초로 구성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우울증에 바치는 헌사이면서 동시에 그 여성주체의 우울증 안에 깃들어 있는 저 완강한 거절과 미친 널을 뛰는 광포한 불안, 그리고 너무나 차가워 눈을 감을 수 없는 상실감의 불가사의에 대한 남성주체의 조심스러운 질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여성의 우울이야 말로 원인과 결과의 주술관계로 빠져드는 것에 대한 주체의 항거, 자유의 원초적 행위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것은 또한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 안에 겹겹이 포개져 있는 모든 여성들의 ‘어떤 슬픔’, 자유롭고 충일한 애도의 시공간을 빼앗긴 그네들의 모든 실존적 우울, 잠재적 죽음에 대한 말 건네기이기도 하다. 자신으로 철저히 퇴각해 버리는 여성의 우울. 이 수수께끼를 응시하는 남성 주체의 시선은 영화에서 엄마의 ‘이유 없는’ 우울을 불안하게 응시하는, 결국은 그 우울에 전염됨으로써만 그 우울의 비밀에 다가갈 수 있었던 로라의 어린/어른 아들 리차드의 시선으로 표현된다. 여성의 우울증을 묘사하는 기존의 재현방식이 여성의 우울증을 대면한 남성주체의 두려움에 더 초점을 맞추곤 했음을 기억할 때 여성의 우울증을 대하는 이 조심스러운 태도야말로 〈디 아워스〉를 뛰어난 영화로 만든다. 얼마나 많은 남성주체들이 여성을 우울증과 무기력증의 늪에서 광포하게 - 때론 지루한 계몽주의적 시민의 언설로, 때론 무참한 폭력적 행위로 - 빼내고자 시도했던가. 그러나 〈디 아워스〉에서 여성관객들은 남성주체들의 과도한 개입에 방해받음이 없이 여성의 우울증에 고요히 가라앉아 ‘댈러웨이 부인’의 정체성을, ‘여성의 시간’을 살아내는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한국여성연구소 전임연구원

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