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의 <밀애>

하하 베를린. 크리스틴 최 감독은 상하이의 풍경을 담은 영화를 만들고 <하하 상하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53회 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베를린의 겨울은 차갑다. 칼바람이 뺨을 후려치고는 쏜살같이 흐린 하늘 속으로 달아난다. 그렇지만 영화제 주 상영관이 들어선 거리에 들어서면 훈훈한 느낌이다. 영화를 통해 자신의 진실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발산하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현실과 꿈을 말하는 새 영화를 들고 베를린을 찾은 감독들로부터, 영화제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여성 스태프들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움직이는 여성들을 만나게 되면 특히 즐겁다.

그 훈기는 변영주 감독의 <밀애>가 상영된 극장에서도 느껴졌다. <밀애>에 대한 관심은 상영 전부터 높았다. 그 열기는 상영이 수 차례 계속돼도 식지 않았다.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상영후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에서 질문을 쏟아냈다.

<밀애>가 베를린에서 얻은 반응은 국내에서 얻은 반응과 질적인 측면에서도 확실히 차이가 있다. 사실, <밀애>의 이야기 소재인 ‘불륜’은 <애마부인> 류의 에로영화에서 <정사>와 같은 고급 영화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다루어진 바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밀애>의 경우처럼 성차에 따라 반응이 뚜렷하게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신혜은에 따르면 이 영화에 관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대는 여느 영화처럼 평일 저녁이나 주말이 아니었다. 가정주부들이 가사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시간대인 평일 오후였다고 한다. 가장 관객이 많이 든 지역은 일산에 위치해 있었다. 이 영화는 단연 여성들로부터, 그것도 답답한 가정 공간에서 살아가는 주부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었던 영화였다.

반면, 남성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어떤 남성 평론가는 이 영화를 남성의 쾌락을 위해 여성의 이미지를 착취하는 남성용 에로 영화와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재미조차 없다고 불평했다. 그가 재미있을 리 없다. 이 영화는 그러한 남성이 추구하는 남성중심적인 욕망이나 쾌락에는 관심이 없으니까.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영화를 한국 영화의 새로운 지평으로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를린 영화제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밀애>의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더 잘 소통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의 남성들이 한국 남성들보다 가부장적 의식이 덜하기 때문일까? 한가지 분명한 점은 서구에서도 성차에 기반한 억압과 폭력이 다른 양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 그런 문제가 없다면 또는 이제는 없어졌다면, 서구 영화에서 매맞는 아내가 변함없이 등장하고 성폭력과 성적 억압이 끊임없이 쟁점으로 다루어지겠는가.

<밀애>의 상영후 진행된 감독과의 대화에서 한 백인 남성 관객이 질문했다. <밀애>에 그려진 것처럼 한국 사회가 여전히 그렇게 가부장적이냐고. 이러한 질문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부장제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사회가 어떤 식으로는 비서구 사회보다 낫다는 우월감과 안도감의 표시일 때가 더 많다. 변영주 감독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국 사회가 답답할 때 이민을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딱히 이민갈 곳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여성들이 맞고 사는 것은 너희 나라도 다르지 않다는 따가운 지적이다. 너 자신부터, 네 자신의 문화부터 성찰해 보라는 뜻. 우쭐거리던 그 남성 관객이 이 우문현답을 알아들었을까. 또 다시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다. 하하 베를린.

남인영/ 서울여성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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