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안희정 2심 선고]
안희정 전 지사 유·무죄 가를
중요 판단 기준은 ‘위력’
1심 “위력 있지만 행사 안했다”
법학자 “위력 존재가 곧 행사”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통념 넘은
‘성인지 감수성’ 담긴 판결 기대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이 18일 서울역사박물관 앞 도로에서 제5차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못 살겠다, 박살내자’를 열어 참가자들이 3부 마무리 집회에서 핸드폰 불빛을 비추며 “안희정도 유죄고 사법부는 유죄다”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제5차 성차별·성폭력 끝장집회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못 살겠다, 박살내자’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안희정도 유죄고 사법부는 유죄다”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오는 2월 1일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나온다.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위력’이 존재는 했지만 위력이 행사되지는 않았다고 판단하면서 2심에서는 ‘위력 사용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앞서 지난해 8월 14일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조병구)는 안 전 지사의 형법 제303조1항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등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선고했다. 안 전 충남지사의 1심 판결의 방향을 가른 것은 ‘업무상 위력’에 대한 재판부의 관점이었다. 위력이란, ‘사람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무형적 힘’을 의미한다. 폭행·협박 뿐 아니라 사회·경제·정치적 지위나 권세 또한 해당된다.

안 전 지사에게 업무상 위력은 있다고 봤지만, 안 전 지사가 이를 이용해 피해자를 성폭행한 것은 아니라는 게 재판부 판단이었다. 또한 재판부는 피해자에 대해 “성적 주체성과 자존감을 갖춘 사람으로 보이고 개인적 취약성 때문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면서 업무 관계에선 고용상의 권력적 ‘갑을’ 관계임을 인정하면서, 업무 외적인 영역에선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남녀 관계라고 선을 그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은 미투(MeToo) 국면에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 기준을 새롭게 정립할 중요한 모멘트로 여겨진다. 한국사회 전반에 미투(MeToo) 운동이 촉발된 지 1년 만에 나오는 이번 판결은 사회적 주목도가 높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항소심 재판부가 위력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는 앞으로 이어질 성폭력 사건 재판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이에 여성계는 유죄 판결을 바라는 시민들의 탄원서를 모아 재판부에 제출하고 재판에서 안 전 지사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모은 ‘시민 질문 운동’을 펼치는 등 항소심 재판부가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길 고대하고 있다. 특히 14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위력에 의한 성폭력,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토론회에서는 변호사와 학자 등 법률 전문가가 나서 1심 판결의 논리적 모순과 판단 오류를 세세히 짚었다. 토론회는 #미투운동과함께하는 시민행동,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이하 민변 여성위),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가 공동 주최했다. 

1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판단기준은 무엇인가’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1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판단기준은 무엇인가’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차혜령 변호사는 민변 여성위가 제출한 의견서를 토대로 1심 판결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민변 여성위는 11월 23일 9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판결 분석팀을 꾸려 1심 판결의 문제점을 정리한 의견서를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에 제출했다.차 변호사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와 같은 무형적 위력은 별도의 ‘위력 행사 행위’가 없더라도, 그 존재만으로도 추행 또는 간음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며 위력의 ‘존재’와 ‘행사’를 구별된 개념으로 인식하거나 이를 분설해 독립적인 구성요건 요소로 판단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9월 판결이 선고된 ‘대사관 대사에 의한 간음 및 추행사건’에서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대사인 피고인이 코이카 직원이었던 피해자에 대해 관리·감독 권한이 있고 그로 인해 피해자피고인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면 인사 등의 불이익을 받을 것을 염려하는 관계였다는 점을 재판부가 판시했을 뿐, 피고인이 위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사했는지 여부는 쟁점으로 삼지 않았다.

차 변호사는 “1심이 ‘위력의 행사’ 요건을 강조하는 취지가, 범행 당시 행위자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직책·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이거나, 조건적으로 그러한 권한을 행사해 피해자를 불이익하게 할 수 있음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이는 위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아닌 사실상 ‘협박’이 있을 것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해석은 위력에 의한 간음 또는 추행을 인정하는 것을 극히 어렵게 만들고, 위력이 작동하는 현실과도 맞지 않으며,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를 입법한 입법 취지에도 반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1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판단기준은 무엇인가’토론회가 열려 이호중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발표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1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판단기준은 무엇인가’토론회가 열려 이호중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발표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도지사의 수행비서는 도지사를 밀착 보좌하는 자리로 공무와 사적인 일의 경계를 나누어 처리하기가 애매한 경우가 많다”며 “도지사가 담배나 맥주를 핑계로 수행비서를 호텔방으로 부르면 수행비서는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1심 재판부가 언급한 ‘성인지 감수성’이 본래 취지와는 달리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통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기서 통념은 ‘침묵은 사실상의 동의다’, ‘끝까지 저항하면 성폭력은 불가능하다’, ‘야한 옷차림이 성폭력을 유발했다’ 등의 성폭력과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들이다. 앞서 지난해 10월 대법원은 성폭력·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우려해 소극적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고, 피해자진술의 신빙성 판단의 기준으로 ‘성인지 감수성’을 제시했다.

“특히 그 판단에 이르는 증거평가를 함에 있어서 피해자가 처해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한 성인지 감수성적 관점을 유지해야 하므로, 일견 피해자가 보인 범행 전후의 언행에 통념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다소의 모순이나 비합리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폭력 범죄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느끼거나 가질 수 있는 심리적 곤경이나 수치심 혹은 트라우마 등으로 인한 것인지 여부를 신중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안희정 사건’ 1심 선고문

이 교수는 “성인지 감수성은 통념에 대한 도전이자 통념의 해체여야 한다”며 “1심 판결의 논증에서는 범행 이후 피해자의 언행이 ‘통념에 어긋난다’는 판단이 선행하고, 이어서 그 어긋남을 정당화할 만한 특수한 사정이 존재하는지의 판단에서 비로소 ‘성인지 감수성’의 개념이 동원된다”고 지적했다. 통념이 건재한 1심 판결의 논증에서 성차별적 구조물인 통념은 여전히 판단의 ‘원칙’으로 작동한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성인지 감수성은 통념에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양해돼야 할 행동양식을 구축하는 개념이 아니라, 통념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언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