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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다!’

요즘 MBC 드라마 <눈사람>을 보면서 하는 혼잣말이다. 처음에 눈사람은 <네 멋대로 해라>를 떠오르게 하는 감각적인 대사들과 인물 설정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중반을 넘어선 지금 눈사람은 <네멋대로 해라>와는 매우 달라지고 있다. 주제가 무거운데도 다소 가벼운 대사나 장면으로 진행됐던 <네멋대로 해라>와는 달리 <눈사람>은 주인공의 무게만큼 드라마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너무 힘들어서 ‘사기 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연욱(공효진)과 필승(조재현)의 마음의 생채기들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고, 연욱이 대책 없이 놓아 버리는 울음들에 나 역시 가슴이 무너진다. 그러나 나는 사기 당했다고 혼자 곱씹으면서도 별수 없이 그 시간이 되면 텔레비전 앞에서 울고 웃는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겉으로 여성 문제를 내세워야만 페미니즘 드라마(혹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호주제나 가정·성폭력·성희롱처럼 민감하고 극단적인 상황을 겉에 내놓고(아주 이상적으로) 여성이 승리하도록 만드는 내용만이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매스컴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진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 드라마가 아닐까. 연욱은 많은 멜로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외롭고 힘들다. 그러나 다른 주인공들처럼 한없이 착하거나 대책 없이 울면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따르고 사랑할 줄 알며 허락 받지 못할 사랑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연욱은 그의 삶에 충실하다.

작가나 PD가 특별히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연욱의 모습이나 대사들이 평범하면서도 당차다는 것이다. 형부를 사랑한 것을 알게 된, 그를 따라 다니는 재벌2세에게 “감정이 있는 인간이라서 그렇다”고 너무도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나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 서툰 반면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는 익숙하다. 내 개인적인 특성도 있지만 착하고 순종적인 여자아이들만이 인정받고 칭찬 받았던 어린 시절을 겪어서 더 그런 것은 아닐까. 내 감정을 확실히 남에게 말하는 것은 -더구나 그것이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고 칭찬해 주지 않는 것이라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매스컴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바람직하고 정상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게 더 절실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도 연욱이의 아픔을 공유하며 TV앞에 앉는다.

연욱아! 네 삶은 네 것이다. ‘네 멋대로 해라!’

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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