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섹스 & 시티>, 시즌 5

디자인 회사에서 편집 디자이너로 일하는 김지영씨(29). 금요일 밤이면 그녀는 어떠한 약속도 마다하고 총총총 사라져버린다. 바로 집이다. 그녀가 즐기는, 사람들과 왁자지껄한 수다도 흥겨운 음악이 출렁이는 클럽도 그녀를 막진 못한다. 쾌활한 사교 생활을 즐기는 그녀가 금요일 밤이면 집으로 발길을 서두르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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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통쾌해요. ‘캐치원’에서 하는 <섹스&시티>요. 그거 보면 저도 정말 뉴욕에 살고 싶어요. 너무 멋지게 사는 거 같아요. 자유롭게 섹스해도 쟤는 너무 헤프다는 둥 이상한 소문 날 걱정 안 해도 되고. 우리나라 남자들은 자기가 자자고 할 땐 언제고, 자고 나선 꼭 말하기 좋아하드라구요. 그냥 쿨하게 섹스하고 바이바이하면 안 되나? 막상 잘 때랑 자고 나서 다르고. 거기다 아직도 자기 여자는 처녀이길 바라잖아요? 정말 짜증나요.”

시작하자마자 입소문을 타고 퍼지기 시작, 웬만한 여성들 사이에선 필수 시청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섹스&시티>. 그 시즌5가 오는 3월 7일(금) 다시 돌아온다. 캔디스 부쉬넬이 <뉴욕 옵저버>지에 연재한 칼럼을 원작으로 한 이 시리즈는 잘 나가는 뉴요커 네 여성의 솔직한 일상을 다룬 드라마다. 뉴욕판 <처녀들의 저녁식사>랄까. 하지만 그 인기는 1만 명이 넘는 <섹스&시티> 동호회(cafe.daum.net/sexandcity)까지 생겼을 정도다. 뉴욕에서 날아온 한 드라마가 트렌드 리더로 주목 받으며 우리나라 2,30대 여성들의 혼을 빼놓은 이유는 뭘까?

결혼해 애도 하나 있지만 이 프로그램은 꼭 본다는 이경미씨(32)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사만다처럼. 자유분방하게 섹스를 즐기면서 자기 일도 잘 하잖아요. 잘 나가는 홍보회사 사장이죠? 그게 너무 멋있어요. 결혼하지 않았다면 저도 저렇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가끔 해요. 남편도 결혼 전엔 멋진 사람이었는데 결혼하고 보니 역시 한국 남자더라구요. 제가 하도 열심히 보니까 남편도 몇 번 봤는데, 뭐가 재밌냐고 그러드라구요. 막말로 여자들이 하나같이 아무 남자하고 막 잔다고 혀를 차던 걸요. 남편이야 뭐 개그콘서트나 스포츠 뉴스가 최고죠. 도저히 말이 안 통해요. 섹스도 뭐 그저 그렇고.”

남자들은 모르지만, 여자들은 열광하는 이 드라마의 매력은 어디서 오는 걸까?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는 최은영씨(25)는 그걸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나라엔 그런 드라마는 눈을 씻고 봐도 없어요. 저희 엄마가 꼭 보는 <인어아가씨>만 해도 그래요. 거기 주인공 은아리영이 잘 나가는 드라마작가잖아요. 언제 일하는지 모르겠지만, ‘행복한 가정부’예요. 언젠가는 여자 할 일이 남편 거둬먹이는 거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정말 화가 나던걸요? 왜 우리나라 드라마속 여자들은 하나같이 사랑밖에 모르고 남편 내조하는 데 목숨 거는지 모르겠어요. 때가 어느 땐데. 드라마가 요즘 시대를 못 쫓아와도 너무 못 쫓아오는 거 같아요.”

실제로 우리 드라마 속에서 일 잘하고 당당한 여성을 찾아보기란 드물다. KBS 일일 드라마 <노란 손수건>의 주인공인 윤자영(이태림 분)은 회사에선 인정 받는 생활도자기 디자이너지만, 자기를 버리고 사장을 택한 아주 오래된 연인 때문에 울고 짜느라 바쁘다. 회사 일은 뒷전이요 현재 임신한 아이를 낳아 기를 태세다. 또 전문직이라 할 의사이지만, 의사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게 푼수에 어린애 같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저 푸른 초원위에>의 채림은 어떤가? 지금은 종영했지만 얼마전에 방영한 드라마 <초대>가 그 대표적 케이스다.

이 <섹스&시티>와 비슷하게 극단적인 캐릭터인 세 여성이 주인공이었던 <초대>에서 김민이 연기한 여성은 처음엔 여러모로 당당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성적 자유분방함은 결국 철퇴를 맞는다. 성적 자유분방함으로 위장했지만, 실제 그녀 속에는 한 남자를 향한 애틋한 사랑이 자라고 있었고, 그 남자가 자기를 거부하자 한없이 질질 짜는 신파의 나락으로 추락한다. 70년대 안방과 스크린을 뜨겁게 달군 <미워도 다시 한번>식 여성 신파는 2003년 안방에서도 여전하다. 여성들은 여전히 ‘사랑 밖에 난 몰라’나 ‘내 인생은 그 남자 것’이다. 연애에 실패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을 절대 멈추지 않는 프로로 그려지는 남성들과 사뭇 다르다. <올인>의 송혜교도 별 다르지 않다. 참으로 참해보이는 그녀는 ‘남자들의 이상형’이라고 할 만하다. 아직도 우리 드라마속 여성들은 자기 결정력을 내세우고 당당한 주체성보다 주제를 파악하고 바닥에서 차분히 기는 데 능숙 혹은 익숙하다. 그녀들 ‘자신’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잡지사 기자로 일하는 임지윤씨는 <섹스&시티>의 매력을 이렇게 말했다.

“캐리 보면 남 얘기 같지 않아요. 저 같아도, 먼저 남자친구와 결혼할까 망설인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결혼하고 싶지 않드라구요. 아무래도 독신이 편하죠. 특히 여자한테는. 결혼 언제 하냐, 노처녀 어쩌구 하는 말만 싹 무시한다면.”

마놀로 블라닉 구두, 샤넬 백 등 스타일리쉬한 그녀들의 화려한 외양도 한 몫하지만, 여성들 스스로 성적으로도 일에서도 당당한 <섹스&시티>의 인기가 계속 상승세이리란 걸 점치긴 어렵지 않다. 드디어 시즌5다. 시즌4에서 캐리는 사랑하지만 결혼하긴 싫어 에이단과 헤어지고, 독신의 공포에 가끔 시달리지만 당당하게 미혼모를 선택한 변호사 미란다는 애를 낳았고, 드디어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니라 사랑이 깃든 섹스를 시작한 사만다는 리차드의 바람기를 알아챘다. 결혼의 신성함을 믿고, 가장 음전한 여자로 그려지던 샬롯도 파탄난 결혼 위에서 꿋꿋하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한국 드라마에 무슨 일은 언제 일어날까? 한국 드라마속 여성들은 언제 철이 들거나 프로 정신이 돌아오거나 2003년도란 세월을 눈치 챌까? 알 수 없다. 대한민국 드라마속 여성들이 낮이나 밤이나 된장찌개 간 맞추기에 몰두하며 다소곳이 자신을 내던질 때, <섹스&시티> 속 뉴요커 여성들은 말한다.

“오르가즘은 지어낼 수 있지만, 애정이나 친밀감은 지어낼 수 없어.” “왜 항상 여자들이 변해야 하는 거야? 남자들이 맞춰 주면 안 되나?” “남자들이 불을 발견했을지 모르지만, 여자들이 그걸 가지고 노는 법을 발견했지.” “여자가 남자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바로 침대 위야. 만약 우리가 남자들에게 영구히 오럴 섹스를 할 수 있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거야.” “남자한테 ‘난 니가 싫어’라고 하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섹스를 즐길 수 있지만, ‘난 널 사랑해’라고 말하면 아마 넌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을 거야.”

조은미 기자cool@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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