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여성 정치인들』 (한국여성의정 엮음)
여성 정치 불모지서 맹활약
정치인들 업적·생애 총망라
첫 여성 국회의원 임영신·
최초 여성 당수 박순천 등
여권 신장 위해서도 앞장
“여성정치인의 이정표 되길”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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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한 사람도 당선되지 못한 것은 유감입니다. 다음에는 이번과 같이 ‘홀애비 국회’를 만들지 않도록 우리 여성이 총궐기해야 합니다.”

한국 정당사상 여성으로는 처음 당수와 5선 국회의원을 지낸 박순천(1898~1983)이 1948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 후보자 18인이 전원 낙선해 여성 당선자가 나오지 않자 통탄하며 한 말이다. 광복의 환희와 혼돈 속에서 세워진 제헌국회도 ‘선각’ 여성 정치인의 눈에는 반쪽짜리 국회로 비춰진 것이다.

‘여성 정치 불모지’나 다름없던 대한민국 정치권에서 여성 정치의 초석을 다진 선구자는 임영신 뿐만이 아니다. 박순천, 김철안, 김윤덕, 이숙종, 김행자, 이우정 등 새로운 길을 개척한 여성 정치인들은 많지만 이들의 이름은 아직 낯설기만 하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이들의 행적을 찾아보기 힘들고 여성 정치인의 활동을 기록을 정리한 자서전이나 평전도 흔치 않아서다. 전·현직 여성 국회의원이 모여 설립한 국회의장 산하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정(공동대표 이연숙·이미경·나경원·박영선)이 펴낸 『세상을 바꾼 여성 정치인들』은 그동안 정치사에서 변방으로 취급받던 여성 정치인들의 의정활동과 생애사를 담았다. 여성 정치 선구자였던 제1~8대 의원 10인 활동과 업적을 정리한 1권 개척기편, 생활정치의 마중물 역할을 한 제9~14대 국회까지 여성 의원 22명을 담은 2권 과도기편이 동시에 나왔다.

책은 기획부터 출간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이미 세상을 떠나거나 고령자를 우선 대상으로 정하다보니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었고 기록이 있어도 깊이 있는 묘사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자서전과 구두 면담 등으로 수집된 사료도 객관성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국회 의안정보시스템과 회의록 자료와 대조 작업을 거쳤다. 일부는 교차 확인이 어렵고 집필자들과 이견이 있어 출판을 보류하기도 했다.

책 편집에 참여한 최영희(80·16대 국회의원) 한국여성의정 사업단장은 “1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배출된 여성 의원은 209명이다. 특히 1대부터 14대까지 여성 정치의 선구자 역할을 한 선배 여성 국회의원의 기록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후배 여성 정치인들의 거울로 삼을 롤 모델을 찾기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최 단장은 “의정 활동을 한 저 조차도 이번 편집 작업에 참여하면서 선배 여성 정치인들의 뛰어난 업적에 깜짝 놀랐다”며 “척박한 여성 정치 현실에서 법안 발의와 다양한 대외 활동으로 여권 신장에 헌신하고 복지와 인권 향상을 위해 앞장선 선배들의 모습은 정치인의 길을 가려는 예비 정치인들과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영희 한국여성의정 문화사업단장(16대 국회의원)이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여성의정이 출간한 ‘세상을 바꾼 여성정치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영희 한국여성의정 문화사업단장(16대 국회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여성의정이 출간한 ‘세상을 바꾼 여성정치인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책은 성평등 확산과 함께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이들의 정치 활동에 주목한다. 그 과정에서 가부장적인 정치권에서 여성 정치인이 겪어야 했던 수모도 고스란히 담겼다. 한국 정치사 최초의 여성 정치인 임영신(1899~1977)은 국회 뿐 아니라 행정부에서도 치욕을 겪어야 했다.

제헌국회에 보궐에 입성하기 직전인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은 임영신을 초대 상공부 장관에 임명한다. 상공부는 당시 귀속재산 처리와 원료부족 문제 해결 등을 다루는 요직 중 요직이었다. 그러자 주요 신문부터 공무원들까지 노골적으로 장관 임명을 반대하고 나섰다. 일부 남성 공무원들은 “서서 오줌을 누는 사람이 어떻게 앉아서 오줌을 누는 사람에게 결재를 받으러 가느냐”며 대놓고 비아냥 거린다. 이에 임영신은  자신을 무시한 상공부 직원들에게 “나는 비록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나라를 세우기 위해 서서 오줌을 누는 사람 이상으로 활동했다. 나에게 결재를 받으러 오기 싫은 사람은 당장 사표를 내라”라고 호통을 쳤다. 임영신의 이 ‘오줌론(論)’은 속좁은 남성들의 성차별 의식을 꼬집는 ‘사이다’ 같은 발언인 동시에 남성 중심 사회에 진출한 여성 정치인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성 정치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1945년 임영신은 최초의 여성 정당 조선여자국민당(정부 수립 후 대한여자국민당으로 개칭)을 창당하고, 1대 국회의원에 이어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임영신과 함께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박순천(1898~1983)은 여성운동 선구자로 꼽힌다. 일제 하에선 독립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을 펼치고, 해방 후에는 여성단체를 조직해 여성운동을 펼친 그에게 정계 진출은 여성운동의 수단이었다. 박순천은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서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서 당선돼 파란을 일으킨다. 국회에 입성해선 유급 60일 산전·산후 휴가와 매달 1일의 유급 생리휴가를 담은 근로기준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앞장섰다. 특히 ‘남편이 있는 여자’만 처벌 하던 간통죄를 여성과 남성 모두 처벌하는 간통쌍벌죄로 개정할 것을 제안해 결국 통과시켰다. 당시 널리 용인되던 축첩이라는 악습을 근절하는 사회개혁적 의미였다.

이 밖에도 호주제 폐지와 이혼배우자의 재산분배청구권을 요구한 이숙종(1904~1985), 의사 출신으로 지적장애인 교육권 문제를 공론화하며 돌봄 정치 선구자로 불리는 구임회(1919~2012), 1세대 여성운동가로 정계에 진출해 성폭력 관련법 입법 연대 활동에 나서고 동성동본 금혼조항 폐지, 국회 여성위원회 설치 추진에 앞장선 이우정(1923~2002) 등의 빛나는 업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명(17대 국회의원) 한국여성의정 사무총장은 “처음 책 출간을 준비한다고 했더니 일부 정치원로는 ‘몇 명 되지 않는 여성의원들 책까지 내느냐’고 타박하기도 했지만, 책이 나오고 나선 사료를 총망라해 정리한 책에 부러운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며 “정치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 책을 통해 여성 정치인이 자신의 분야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세상을 변화하는데 일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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