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여성들이 쓴 독립선언서

1919년 중국 지린서 작성돼
여성의 애국심·투쟁정신 고취
8명이 연서…김숙경 신분만 확인돼
‘본받을 선생’에 논개·화월 제시

1919년 작성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1919년 작성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일제강점기 독립을 촉구하면서 반포된 격문은 1919년 ‘3·1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뿐만 아니라 각종 청원서까지 100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여성들의 주체적인 독립 의지를 떨쳤을 뿐 아니라 순 한글로 작성하고, 대표적인 애국자로 기생들을 호명해 신분 고하를 초월해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는 평등의 정신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작성된 지 64년 만이다. 중국 지린에서 작성됐고 당시 1천장 이상 국내외에 배포됐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남아있지도, 조명되지도 않았다. 이후 1983년 미국에 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 수산 선생의 집에서 발견돼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한지로 된 선언서에는 가는 붓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35행, 1393자(서명 제외)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3·1독립선언서 등과 달리 순 한글로 작성됐다는 점도 특징이다.

선언서는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억울함, 분노와 고통을 담으면서 여성과 남성이 서로 대등하다고 선언했다. 특히 여성이 사회적으로 활동하고 주체화되는 것을 억누르는 분위기 속에서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체성을 힘있게 주장하고 있다.

[전문] 1919년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와 달랐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조선총독부의 내부 문건과, 일본 외무성 자료에 남아있고, 신한민보에도 기사화됐다. 특히 미주 한인사회에서 발행된 신한민보 사설에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상세하게 다룬 기사를 1990년대 박용옥 전 성신여대 교수가 최초로 발견했고 선언서에 관한 첫 논문을 작성했다.

이 선언서에는 여성 8명이 연서했다. 서명인은 김인종·김숙경·김오경·고순경·김숙원·최영자·박봉희·이정숙 등이다. 이중에서 김숙경만이 독립운동가 황병길의 처로 추정되고 있다.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애족장이 서훈된 이정숙과 동일인이 아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선언서를 작성하게 된 배경이나 어떻게 배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독립기념관 학술사업부 담당자에 따르면 김숙경이 속한 대한애국부인회가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개개인에 대해서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다. 이윤옥 소장은 “여성들의 기록 자체가 크게 부족하고 보훈처의 정보도 남아있지 않다”고 “특히 만주쪽에서 활동한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지식층만 아니라 누구나 읽도록 순 한글로 쓰여져

독립기념관 최우석 연구원은 이 선언서가 순 한글로 작성됐다는 점은 지식층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읽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독립선언서 중 한자가 많은 것들은 여성뿐만 아니라 당시 국민이 사람들이 읽기에 어렵다. 심지어 한자뿐만 아니라 한글을 독해하는 국민이 많지 않았는데 순 한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평등의 가치가 담겨있다.”

박용옥 전 교수는 “여성들이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반포했다는 것에 대해 여성의 놀라운 자부심임 주목해야 한다”라고 했다. 남녀가 평등한 국민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선언서에는 독립운동에 ‘본받을 선생’으로 기생 논개와 화월을 제시해 여성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의 위기에서 활약한 논개와 화월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의 사리, 이탈리아의 메리야 등 각국 여성들의 사례를 들며 우리 여성들도 이들을 본받아 떨쳐 일어나자고 독려하고 있다.

‘진주의 논개 씨와 평양의 화월 씨는 또한 화류계 출신으로 용력이 무쌍한 적장 청정과 소섭을 죽여 국가를 다시 붙든 공이 두분 선생의 힘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니 우리도 이러한 급한 때를 당하여 겁나의 구습을 파괴하고 용감한 정신을 분발하여 이러한 여러 선생을 본받아…’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기생을 예로 든 것에 대해 “여성 중에서도 평범하고 더 천시된 여성의 주체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여성의 가치, 능동성을 끌어내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성의 주체성을 얘기하면 1910년 이전 애국계몽기 때 환기 됐던 인물은 잔다르크가 대표적이었지만 여기에는 없다”는 것이다.

박 전 교수는 “역사 속 기생에 대한 유교사회의 고정관념인 남성 추종적 여성관을 바꾸어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투쟁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또 기생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측면도 있다고 했다.“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도 기생들이 솔선해서 뛰어들었고, 1910년 국권강탈 때는 일본헌병대장이 화류계에 찾아가도 아양 떨거나 하지 않고 유령대하듯 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전하면서 “직업이나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애국심이 없는 게 아니다”라 “누구나 해야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했다.

선언서 맨 끝에 표기된 선언서 작성 날짜는 ‘기원 사천이백오십이년 이월 일’로 나와 있지만 음력인지 양력인지를 놓고 연구자들 사이에 설이 분분하다. 음력일 경우 3·1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박 전 교수는 “미주의 대표적인 항일 부녀단체인 대한여자애국단에서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모든 행사에서 ‘3·1독립선언서’와 더불어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낭독해 여성들의 독립정신을 진작시켰다”고 했다.

유관순 열사 ⓒ뉴시스·여성신문
유관순 열사 ⓒ뉴시스·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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