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겨드랑이·비키니라인까지
‘털’도 관리해야 하는 여성들
코와 입술 사이 털을 제모하는
나는 과연 페미니스트일까

김지양 플러스사이즈 모델·‘66100’ 대표
김지양 플러스사이즈 모델·‘66100’ 대표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잘 지내셨죠?”라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과 “요새도 바쁘시죠?”라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 그렇다. 짐작하셨겠지만 나는 후자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는 소규모 자영업자(쇼핑몰 사장)로서 모델이자 CS 응대까지 멀티플레이어로 야근을 밥 먹듯 하며, 사무실 인근의 외할머니댁에 얹혀살고 있기에 딸이자 손녀로서 간간이 효도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사회적 역할’에서의 퇴근은 먼 나라 얘기가 된 지 오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여성 자영업자 모임 호스트를 맡고 있고 이따금 들어오는 외고와 인터뷰, 티브이 출연, 강연까지 해내고 나면 그제야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겨우 낼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일은 서울에서 하지만 진짜 내 집은 강원도 원주다. 1~2주에 한두 번 토끼 같은 자식 고양이 두 마리에 여우 같은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원주에 가면 비워둔 내 자리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내 애완 화분들에 물 주고 시든 잎을 따주고, 고양이들 놀아주고 발톱 깎이고 돌아서면 잠깐의 달콤한 휴식은 금세 끝나 있다.

그렇게 과로를 지속하느라 수면의 질과 양이 형편없어진 몇 년 사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면 화장을 지울 기력도 없이 지쳐 쓰러져 잠들기 시작한 것이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성에게 가중되는 꾸밈 노동에서 결코 벗어나기 어려운 모델이라는 직업을 가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모델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순간에는 최대한 <66100> 대표 역할을 수행하고 일상을 유지하는 데 불편함이 없는 복장과 차림으로 사는 것이었다.

그런데 딜레마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보통, 운영하고있는 쇼핑몰 신상촬영을 할 때는 화장을 하는데 이번 신상 업데이트 간격이 조금 길었던 탓에, 게다가 올해 시작부터 지금까지 살인적으로 바빠 면도 할 정신도 없이 지낸 바람에 인중의 콧수염이 눈에 보일 정도로 거뭇해진 것을 촬영 당일에서야 발견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을 하지 않을 때는 내 얼굴에 뭐가 났는지 그렇게 유심히 쳐다보지 않는다. 아닌 말로 당장 바빠 죽겠는데 인중의 털이 빨간색인지 노란색인지 알 바인가.

사실, 남성들은 잘 모르지만 제법 많은 수의 여성들이 인중 면도를 한다. 남자들처럼 면도기와 쉐이빙 크림으로 매일같이 면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털’이기는 해서 일단 한 번 면도를 시작하면 레이저 제모나 주기적으로 왁싱(뜨거운 왁스를 녹여 바른 후 천을 붙여 잡아뜯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잘린 단면과 진해진 모색이 ‘나 여기 있소’하고 존재감을 뽐내는 것을 막기 어려워진다. 보통은 메이크업으로 대강 가려지기도 하는데, 그날 내 코와 입술 사이의 무성한 ‘털’들은 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해결될 종류의 것을 넘어서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그런데 고민이 무색하게도 나는 면도하지 않은 채로 촬영을 마쳤다. 웃프게도 면도기를 사러 나갈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촬영본을 받아 들고 나는 그닥 크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닌 나의 인중 털에 안도했고, 애꿎게도 열두 살, 온몸에 돋아나기 시작한 털들이 부끄러워 아빠 면도기로 팔, 다리, 인중을 면도했던 나 자신을 원망했다. 그리고 10년 전, 다리와 겨드랑이, 비키니 라인까지 레이저 제모를 하면서 인중은 하지 않은 나를 책망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조금씩 자라나 AS를 해줄 때가 된 겨드랑이와 민둥한 다리의 한두 가닥씩 돋아난 털을 매만지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인중, 면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아예 레이저로 지질 것인가? 그리고 면도를 하거나 레이저로 인중을 지진 나는 더는 페미니스트가 아닌 게 되는 걸까?

묻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인중, 면도하셨나요? 그리고 이런 고민, 저만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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