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8월 5일 방북길에 오르는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과 방북단이 손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15년 8월 5일 방북길에 오르는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과 방북단이 손을 흔들고 있다. ©뉴시스

한국 여성사와 사회운동의 거목, 이희호 선생님

이제 평안히 쉬십시오.

늦은 밤,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마음 한 부분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어른이 또 가시는구나하는 막막한 마음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안 좋으시다는 소식도 있었지만 그래도 또 떨쳐 일어나 주시기를 빌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소천 하셨으니 내내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역사를 소개하는 연혁은 ‘1956년 여성문제연구원의 방 한 칸을 빌어’라는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뚜렷이 드러나는 기록이 없어도 상담소 역사의 시작부터 이희호 선생님의 손길이 닿아 있고, 63년의 상담소 역사 곳곳마다 선생님의 발길이 머물러 있습니다. 큰 목소리와 몸짓으로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도 겸허하고 정직한 태도로 평생 바른길을 걸어 한국의 여성계와 사회운동, 정치사 곳곳에 위대한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선생님께서 평생 사랑하셨던 YWCA와 마지막 자리가 된 김대중평화센터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의 일생은 한국 여성과 한국 사회의 진일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전에 상담소 창설자인 이태영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태영 선생님 그리고 상담소와의 인연을 돌아보며 ‘한국 전쟁이 끝나고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들의 비참한 삶을 살피고 그 해결을 위해 1952년 여성문제연구원의 간사로 참여해 실무를 맡았고 이태영 선생님과 함께 보람 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하신 바 있습니다. 상담소가 문을 열 당시 선생님은 미국 유학 중이었으나 여성문제연구원을 중심으로 상담소와 인연을 맺어, 이희호 선생님은 상담소의 평생회원이면서 건축회원으로 상담소 역사의 든든한 한 축이 되셨습니다.

그 후 1987년 여성백인회관에서 열렸던 상담소 삼십년사 출판기념회부터 2014년의 이태영 선생님 탄생 백주년 기념 추모식까지 상담소와 함께 한 선생님의 여정을 돌아보니 선생님이 얼마나 상담소와 한국 가정의 문제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셨는지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상담소 창설자 이태영 선생님이 떠나시고 상담소를 이끌게 되었을 때, 저는 빈 벌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막막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제 곁에는 제가 항상 본받고자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신 어른들이 계셨고 그 제일 앞에 이희호 선생님이 계셨기에 상담소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선생님 생전에 저와 언론인인 제 남편 김종철(동아투위 위원장) 씨를 각별히 사랑해주신 것도 마음 깊이 새기고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선생님은 한국 전쟁 직후인 1954년 서른 두 살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나 석사학위를 받은 선구자이면서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어려운 길을 걸었던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하여 신념을 함께하는 동지적 부부라는 새로운 롤 모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상담소가 지향하는 가정 내 부부평등과 남녀평등의 상징이었던 선생님의 동교동 자택 대문에 걸려 있던 두 개의 명패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안식을 기원합니다.

곽배희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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