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성평등을 말하다]
연재를 마치며

‘보슈’를 만드는 서한나 편집장, 권사랑 대표, 신선아 디자이너(왼쪽부터). ©이지혜
‘보슈’를 만드는 서한나 편집장, 권사랑 대표, 신선아 디자이너(왼쪽부터). ©이지혜

 

법원은 여성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리얼돌 수입을 허가하고, 성폭력 가해자들은 미투 운동에 무고죄로 대응하며 유튜브에서는 매일 같이 여성혐오 콘텐츠가 쏟아진다. 오늘의 한국은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페미니스트 여성이 쉽사리 낙관하기에 힘든 곳이다. 나 역시 2016년 강남역 사건 이후 페미니즘을 접하고, 빨간 약을 먹은 사람처럼 잠시 기뻐하고 오랫동안 절망했다. 내가 겪은 부당함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되면서 안개가 걷힌 듯 시야가 또렷해졌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며 해쳐나가야 할 참담한 상황 역시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서 [문화예술, 성평등을 말하다] 시리즈를 통해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여성들을 만나는 것이 기대되는 한편 두렵기도 했다. 문화예술 산업 내 성평등한 문화환경을 지원하고 조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취지였지만 희망적이지 않은 진단을 해야 하거나 지친 목소리를 전해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기우였다.

취재 대상이었던 대전 지역 여성주의 매체 보슈, 극단 신세계,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여성영화인모임, 롯데컬처웍스, 광주여성필하모닉 등 6개 단체와 기업은 추구하는 목표도 그걸 이루기 위한 방법도 다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불편을 느끼고 고통을 듣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주들’ 공연 모습. ©극단 신세계
‘공주들’ 공연 모습. ©극단 신세계

“그렇게 계속 차별 받아왔던 거 같아요. 누군가는 계속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다른 고통을 얘기하고 있는 사람들한테 정확히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극단 신세계 김수정 연출가)

“여성을 대상으로 행사를 한다고 하면 한 번씩 뭔가에 부딪치는 거죠. 여성과 남성이 겪는 문제가 다르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해도가 높지 않아요.” (‘보슈’ 권사랑 대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업 안에서 구성원들의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을 제거하고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지역의 청년으로서 목말랐던 여성주의 의제를 외부에서 수혈 받는 대신 직접 만들기로 한 보슈, 영화계 성폭력에 대응해 성평등센터 든든을 세운 여성영화인 모임, 직원들의 경력 단절을 막기 위해 남성의무육아휴직을 정착시킨 롯데컬처웍스, 설 자리가 부족한 여성 연주인들의 무대가 된 광주여성필하모닉까지. 이들은 모두 행동하기를 택했고 덕분에 변화는 동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롯데그룹이 지난해 공개한 남성육아휴직을 콘셉트로 한 홍보 광고 속 한 장면. ©롯데
롯데그룹이 지난해 공개한 남성육아휴직을 콘셉트로 한 홍보 광고 속 한 장면. ©롯데

 

2017년 대표적인 영어사전 메리엄웹스터가 올해의 단어로 ‘페미니즘’을 선정한 이후 최근 몇 년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때가 없었다. 국내에서도 페미니즘 관련 도서의 판매량이 급증했고, 여성들은 화장품이나 옷에 전처럼 돈을 쓰지 않는다. 변화는 개인을 넘어서 사회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치단체의 성인지 예산이나 정부의 성평등 지원 사업 역시 늘고 있다. 변화는 확실히 오고 있지만 필요한 만큼 빨리 속도가 붙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화예술, 성평등을 말하다]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답답한 상황을 탓하기보다 움직이는 편을 택했다.

“분명 바뀔 거라고 보지만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저희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꾸준히 지원하고 두드릴 겁니다.” (여성영화인모임 채윤희 대표)

“순식간에 좋아지는 건 어렵다고 생각해요. 저희는 끊임없이 지적 하면서 잘 굴러가게 사이클을 만드는 거죠.” (미디어운동본부 이윤소 부소장)

상황은 여의치 않고, 시절은 수상하지만 이들은 희망을 품기로 결정했고, 그 방식에서 역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절되지 않고 주변의 여성들과 함께 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보슈는ᅠ대전이 아닌 다른 지역 여성들과도 연결되려고 전국을 무대로 삼고, 극단 신세계는 단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공동창작 방식으로 한층 더 깊어진다. 그리고 여성영화인 모임은 주변의 여성 영화인들에게서 힘을 얻는다. 세상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공감과 연대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지혜‘텐아시아’, ‘맥스무비’ 등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썼다. ‘뜨거운 사이다’, ‘무비스토커’ 등의 방송과 지면을 통해 여성과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고 있다.
이지혜 ‘텐아시아’, ‘맥스무비’ 등 매체에서 기자로 일하며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썼다. ‘뜨거운 사이다’, ‘무비스토커’ 등의 방송과 지면을 통해 여성과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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