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부터 시작된 여성의 성상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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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여성지 뒷면의 백분 광고. 1920년대의 광고. 일본제품 판매를 위한 광고 소재로 여인의 누드가 사용되고 있다.

이 글은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에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지원을 받아 연구되고 있는 〈한국 여성 근·현대사〉내용 중 일부이다. <편집자 주>

“요새 와서는 상품화한 여자에 대하여 남자의 영리심이 매우 영리해진 모양 … 상품을 팔아도 남자보다 여자, 심지어 광고판을 그려도 젖퉁이를 내민 여자를 그린다 … 물건에 여성을 혼합하여 파는 줄은 몰라도…”

여성을 내세워 불필요한 물건까지 팔아치우는 자본주의 상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 글은 한두 해 전 어느 문화비평서에 실린 기사가 아니다. 1922년 8월에 〈신생활〉이라는 잡지에 실렸던 글로 제목은 〈여성광고 유행병〉이다. 성의 상품화를 비판하는 오늘날의 논지와 다를 바 없어 놀랍다.

담뱃갑 3개에 기생사진 카드 7장

식민지 시기의 농업과 저임금 노동자들의 수탈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성들에게 “이름 모를 각색의 비단패물, 금은 세공, 양산, 향수, 백분”등의 판매를 부추기고, 이를 이용해 한껏 멋을 부린 여성들이 또다시 새로운 소비를 부추기는 상황은 낯설어서 당황스럽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근대화를 너무 단선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결과이다. 조선의 식민화는 산업화, 자본주의화와 더불어 이루어진 ‘복합적인’수탈의 역사인 것이다.

여성을 상품에 끼워 파는 역사는 의외로 오래돼, 조선이 외압에 의해 근대화되고, 산업화촵자본화 과정이 급진전되던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런던 타임스〉1887년 10월 17일자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조선연초주식회사에서 빈 담뱃갑 세 개를 가져오는 사람에게 단편영화를 보여주고, 모든 관람객들에게는 기생사진 카드 7장씩을 나눠줬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조풍연 선생의 회고에도 나타난다. 개화기의 칼표 담배는 중국미인카드를 끼워 팔았는데 각기 다른 미인 사진을 수집하기 위해 담배를 사는 사람도 있었다니 이만하면 효과적인 전략이었던 셈이다. 오늘날 끼워 팔기 - 경품의 역사가 이미 이 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여성이 가장 손쉬운 상품으로 자리매김 됐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조선의 식민화는 조선을 원료 공급지로 만드는 일 뿐 아니라 상품의 판매처로 만드는 일도 병행해야 했고 따라서 불필요한 소비를 창출하는 일들이 필요했다. 세계적 불황으로 경기가 극도로 나빠진 1930년대 경성에 미스코시, 조지아, 미카나이, 화신 백화점이 세워진 것만 보더라도 조선 경제의 이율배반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상품 대량생산과 맞물려 조선이 이의 소비지 역할을 하면서 여성의 상품화는 가속화됐다할 수 있는데 1910년대부터 여성은 본격적으로 상업 광고에 등장하게 됐다. 각종 신문과 잡지의 서점광고, 약광고, 의복광고, 술광고, 화장품 광고에서 미인의 얼굴은 종종 등장한다.

드디어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서울 거리 모든 간판 그림의 70∼80%가 꽃 아니면 여자로 덮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게다가 조선의 근대화와 더불어 들어온 서구문화의 열풍으로 인해 미인의 얼굴형도 점점 서구여성을 기준으로 변해간다. 콧날이 오똑한 백색미인이라는 서구화된 미인예찬의 일상화도 이와 더불어 이뤄지기 시작했다.

데파트 걸, 숍 걸 등 상점 여점원 인기

이처럼 과잉소비의 유도(오늘 날 우리도 역시 광고로 인해 과잉소비하고 있지 않은가)를 위해 여성을 상품화하는 방법은 단지 여성의 아름다움을 광고지에 인쇄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여성들의 일자리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창출됐던 것이다. 그 당시 신여성의 새로운 직업으로 각광받던 데파트 걸, 숍 걸 등은 백화점이나 상점의 여점원을 가리킨다. 남성들은 남성이 물건을 팔 때보다 여성이 물건을 팔 때 더 많은 물건을 사갔기 때문에 돈을 벌려는 사람들은 기꺼이 아름다운 여자를 점원으로 내세웠다. 직업 여성들이 각종 추문에 시달리게 된 것도 이러한 일자리가 지닌 불순한(?)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삼천리>사 기자로 있던 소설가 최정희는 “여자를 택하여 쓰는 자본주의 심리를 생각하여 보면 모두가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여자라는 한가지 조건으로 리용들이 되는 편인데…”하며 여성을 돈 벌기 위한 수단으로 내세우는 현실을 개탄했다.

한 간호사는 병원에 오는 환자조차 간호사를 위해 찾아오는 수가 있어 미혼 여성만 취직이 되며 수다한 간섭을 받는다는 고충을 털어놓기도 한다. 나도향의 〈여이발사〉라는 소설을 보면 밥값도 내지 못해 친구에게 돈을 꾸러 가려고 전당국에서 차비를 빌린 청년이 나온다. 이 청년의 이야기는 봉건 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겪는 한 남성의 문화 충격에 의한 어리석은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친구에게 갈 차비를 남기고 값싼 이발관에서 이발을 하려던 이 청년은 ‘아름다운’여이발사가 면도를 해주자 거스름돈조차 받지 않고 기분 좋게 이발소를 나서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물론 그 청년은 친구에게 갈 차비도 잃었고 따라서 하숙에서 쫓겨날 판이 됐다. 이처럼, 여성의 아름다움은 남성에게 돈을 호기롭게 쓰도록 하는 강력한 힘이 있었던 것이다. 〈여성광고 유행병〉이라는 기사에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남자가 다반사로 내던지는 말이라도 여자의 입으로 굴러 나올 때는 귀여움과 동정으로 박수갈채를 하는 것이 여자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듯 하지만 기실은 여인에 대한 남자의 재롱!”

남성들은 여성의 아름다움 때문에 기꺼이 지갑을 열긴 하지만 그것은 여성에 대한 진정한 찬탄이 아니라 아이들의 재롱 정도로밖에는 여기지 않는 오만함이 그 근저에 깔려 있다. 여성의 상품화는 조선의 자본주의 역사와 그 나이가 같으며, 그 이면에는 여성을 일개 감상물로 여기는 관음증적 시선이 있었던 것이다.

변신원/ 아시아여성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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