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여학생 스포츠 대중을 현혹시키는 마술 상자

우리나라 여성 스포츠 역사 1892년부터 시작

신여성들 육체의 긍정, 활기찬 동작 스포츠 선호

국가주도 스포츠 근대사회 규칙과 훈련장이기도

당시 독자들의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심훈의 〈상록수〉(1935)에는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한 영신이 체조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얘, 동혁이한테 온 여학생이 체조를 다 한다더라.”하는 소문이 퍼지자, 이삼일 동안에 조기회원이 부쩍 늘었다. 늙은이 여편네들 할 것 없이 모여들어서 무슨 구경이나 난 것처럼 운동장인 잔디밭이 빽빽하도록 들어차는 날도 있었다. (…중략…)

“여러분, 조기회에 참가를 합시요. 아침 일찌기 일어나 운동을 한바탕 하면 정신이 깨끗해지구, 첫째 소화가 잘 됩니다.”하고 구세군처럼 선전을 하다가, “우린 밥이 너무 잘 내려서 걱정이라네.”“체증이나 나거던 옴세.”하고 빈정거리는 사람이 있어서, 건배는 아무 말 못하고 뒤통수만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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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운동복.

<사진·<한국여성양장변천사> 유수경, 일지사, 1990>

이 장면을 보면 당시 여학생이 체조를 한다는 것이 일반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자 빈정거림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불과 한세대 전만 하더라도 대낮 거리 출입이 규제됐고 외출 시에는 장옷을 입고 다니는 등 엄격히 폐쇄된 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조선 여성들에 비하면 신여성의 체조가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나 안석주의 만화를 보면 여성들은 복싱 경기 관람에 열광하거나 집안일을 마다하고 스케이트장에 가는 걸 즐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신여성들은 스포츠를 개명의 한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즐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여학생 운동회, 임금을 홀리려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여성의 스포츠 역사는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기도 한 이화학당에서 1892년부터 체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운동 시의 복장은 짧은 저고리에 긴 치마였다. 여성들은 가슴을 단단히 조여 맨 채 치마를 치렁거리며 운동에 임했다. 이것이 건강상 해로울 것 같아 조끼허리 치마를 입으라고 권장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사정은 이 정도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남녀 유별히 혹심한 때라 여성의 스포츠에 대한 사회 여론이 들끓었다.

어전 운동회라 해 고종황제 앞에서 학생들이 도수 체조 등의 매스 게임을 베푸는 경우도 있었다하는데 이 때 여학생들이 입은 옷은 블루머(무릎 위나 아래를 고무줄로 졸라매는 여성용 운동 팬츠가 이와 같이 불린다)스타일의 운동복이었다. 그런데 다 큰 처자들이 팔다리를 내놓고 임금을 홀리려 들었다 해 이 어전체조를 불궤의 대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 충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완화된 것 같다. 1906년 이후 여학교에서도 학교마다 운동회가 빈번히 열리게 됐고 여학교간의 연합운동회도 많이 열리게 된다. 1907년 장충당에서 진명여학교 주최로 개최한 여학교 운동연합회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고종도 참여했지만 더 이상 전과 같은 물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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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대 사회체육의 발전으로 여러 종류의 스포츠 웨어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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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테니스) 여성복.

정부, “남성과 동등하기 위해” 여성 스포츠 권장

이처럼 여학생 운동회 및 여학생 연합운동회, 각종 대회가 열리면서 한편으로는 조선 여성에게 운동을 장려하는 각종 기사가 신문과 잡지에 실린다. 이 기사들은 하나같이 스포츠가 육체와 정신의 건강에 좋다는 기사들이다.

여성에게는 수영과 스케이트 등이 권장되기도 한다. 글의 논조는 조선 여성이 자신의 건강관리에 관심이 적다는 사실을 반성하면서 남성과 동등해 지기 위해서라도 운동에 힘써야 함을 주장한다. 운동의 효과는 신체의 균형발달, 동작의 기민성, 정신의 쾌활함, 게다가 아름다움 등이다. 여성이 스포츠를 하는 것은 허용 정도가 아닌 권장의 수준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함께! 정부 주최의 각종 대회가 그 증거이다. 1923년 6월 경성제일고등여학교에서는 8개의 여학교가 모여 제 1회 전조선여자 정구대회를 열게 된다. 1925년에는 마산 의신 여학교와 진주 자원여학교가 야구전을 벌이기도 한다. 매년 사이클 경기도 열렸다. 1928년에는 이화학당에서 스케이트 링크를 만들어 동계체육으로 장려했고, 농구경기는 일반에도 널리 소개된다. 이 외에 아주 귀족적인 운동도 이미 들어와 있었는데 1927년에는 원산고등여학교에 스키장이 설치된다.

1940년의 회화에 ‘스키복을 입은 여인’이 등장한다. 이외에 승마와 검도, 골프 등을 즐기는 여성들도 있었다.(지금의 효창공원 자리가 사실은 1921년 세워진 골프장이었다.)

스포츠 규율, 근대 산업사회 훈련장

왜 그랬을까? 우선 전에 없던 육체의 긍정, 활기찬 동작을 통해 생의 활력을 불어넣는 스포츠는 바로 그런 측면 때문에 환영받기도 했다. 신여성들이 운동에 열광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런 개인 체험에 근거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또 다른 진실도 있다.

근대화와의 관계이다. 산업화, 근대화가 진행되기 이전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의 순환에 따른 삶이 일상적인 것이었고 따라서 일과 노동이 엄밀히 구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산업화의 진행은 일터와 휴식처, 노동시간과 여가 시간을 분리시켰다. 이와 더불어 스포츠와 오락문화가 노동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된다. 게다가 스포츠의 규율은 근대 산업 사회의 규칙과 룰을 훈련시키는 연습장이기도 했다. 다음의 에피소드를 보자.

1912년 서울 시내 중학교의 연합 운동회가 남대문 밖 청파정에서 열렸는데, 트랙을 몇 바퀴 도는 장거리 경주에서 앞뒤를 혼동, 한바퀴 더 돌아야하는 꼴찌에게 선착 깃발을 들려줘 편싸움이 벌어졌다. 운동 경기마다 진 편에서 싸움을 걸어오기 일쑤였고 각급 학교 교장끼리 모여 스포츠는 떳떳하게 지는 것이 비겁하게 이기는 것보다 훌륭하다는 정신 교육을 결의하기까지 했다.

이 에피소드는 게임규칙의 습득과 페어 플레이 정신의 교육에 있어 스포츠가 기여한 바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스포츠, 식민지 여성 현실 망각하는

요소 중 하나

이런 저런 이유로 권장됐던 스포츠는 그러므로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국, 식민지 조선이 전시체제화 되었던 30년대 후반 스포츠는 전쟁을 위한 체력 단련이라는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한다. 당시의 기사를 보자.

“스포츠의 신체제라 함은 스포츠의 본질적 요소와 기능을 충분히 인식한 후, 현하 전시 생활 아래 있는 국민 생활에 대한 모든 요구에 맞도록 하는 추진력을 의미합니다. (…중략…) 대중의 행동을 지도하며 규정하는 동시에 대중의 의식 있는 행동이 조직 개혁의 중대한 동인이 될 것입니다. (〈여성〉, 1940)”

그 때나 이 때나 스포츠는 대중의 에너지이자 대중을 현혹시키는 마술 상자이다. 영화, 연극, 대중가요 등 다양한 대중문화·오락문화의 발달과 스포츠는 식민지 백성인 여성이 식민지 조선의 수탈적 구조를 망각하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나빠질 때 지배의 도구는 비로소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 글은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에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 학문지원을 받아 연구되고 있는 〈한국여성 근·현대사〉 연구의 일부를 새로 쓴 것이다. 〈편집자 주〉

변신원/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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