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래퍼 슬릭(SLEEQ)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남성 서사 중심의 한국 힙합
탈출해 새로운 시장 만들다

2월 25일 래퍼 슬릭(Sleeq)은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며 앞으로 활동 계획을 밝게 웃으며 답하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홍수형 기자
2월 25일 래퍼 슬릭(Sleeq)은 여성신문과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한국 힙합 시장에서 착실히 인지도를 쌓다가 회의감을 느껴 제 스스로 시장을 버렸다"고 밝혔다. ⓒ홍수형 기자

“저에게 힙합은 그저 음악 장르일 뿐 큰 의미는 없어요. 거창하게 ‘힙합은 나의 삶’ 이런 것이 아니죠. 힙합에 매력을 느껴서 음악을 시작했지만 다양한 장르를 골고루 좋아해요. 현재도 다른 장르를 많이 시도하고 있어요. 저는 그냥 힙합을 동료로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요.”

지난 1월 26일 래퍼 슬릭(30·본명 김령화)은 새 싱글 앨범 ‘I'M OKAY’를 발매했다. 슬릭은 그동안 힙합 신(scene) 안에서 젠더 이슈로 주목받았다. 이번 앨범에서는 그 과정에서 느껴온 압박과 스트레스에 대한 마음을 랩으로 풀었다. 새 앨범을 발매한지 한 달째 되는 날, 그를 여성신문 본사(서울 서대문구 소재)에서 만났다. 지금까지 앨범을 두 장 냈다는 그는 인터뷰에서 “앨범을 낼 때마다 이거까지만 하고 그만둬야지 생각한 적도 있다”며 창작의 부담감을 표하기도 했다. 

언론정보학 학위가 있어요. 음악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한 것인가요?
“사실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음악을 하고 있었어요. 그 와중에 저희 집에서는 대학에 꼭 가라고 고집했어요. 결국 그 등쌀에 밀려 원서를 쓰고 입학을 했죠. 다만 저에게 대입의 의미는 ‘위장’이었기 때문에 학업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대학생활하면서 교내 흑인음악 동아리에 들어가서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고 제 음악 활동에도 큰 도움을 받았어요.”

음악의 영감이나 원동력은 어디에서 주로 얻나요?
“최근 오랜만에 공연을 하면서 크게 느낀 것이 있어요. 제 노래를 듣고 위로받는 사람들에게 SNS로 디엠이 와요. ‘슬릭 노래를 듣고 힘이 났다’, ‘노래가 좋다’ 등 이런 말을 들으면 ‘내가 잘 하고 있구나’, ‘잘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겨요. 영감은 항상 열어놓는 자세를 가지려고 해요. 예전에는 제 감정이나 상황 등 특정한 것에 의존했던 경향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걸 파헤치는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사람이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어떤 것을 노래로 만들 것인가’를 생각하며 ‘그 어떤 것이든 노래로 만들 수 있다’는 마인드로 작업하고 있어요.”

여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서사가 힙합이라면 관두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합국 힙합을 소비하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은 차별과 폭력을 ‘솔직함’이라는 말에 포장하고 있어요. 그건 분명한 권력남용이에요. 그때 저는 그런 한국 힙합 신에 속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 취지로 했던 발언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활동을 열심히 해서 ‘이게 한국 힙합 신이다’라며 그 타이틀을 뺏어 오고 싶어요.” 
2016년도에 프리스타일 랩을 통해 페미니스트임을 밝혔어요. 요즘 관심 있는 이슈는?
“아무래도 우리 사회 내에서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와 그들의 인권에 관한 것이죠. 페미니즘 역사 이전에는 ‘권력관계’라는 것이 있잖아요. 약자를 골라 타자화하고 그들이 멸시와 폭력을 당해도 당연한 사회를 만들었죠. 현재도 약자는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그 대상만 유색인종-여성-성소수자로 바뀌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번 사건만 해도 저는 제 주변 트랜스젠더 친구들에게 당사자 입장을 많이 듣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는 여성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 굉장히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그렇게 말해서 당황스러웠어요. 저는 아무도 다치지 않는 선에서 함께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라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차별과 고통을 받는 이들 편에 서서 얘기를 듣고 그들을 위해 외치는 것인 것 같아요.”

ⓒ홍수형 기자
페미니스트 래퍼 슬릭(SLEEQ). ⓒ홍수형 기자

래퍼가 아닌 평범한 30대 여성 김령화의 삶도 궁금해요.
“사회 속에서는 예술인으로서 대우를 잘 받고 이렇게 인터뷰도 하는데요. 평범한 30대 여성 김령화로서는 가족들 사이에서 조금 유별난 아이라고 인식되는 것 같아요.(웃음) 제 가족 도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관심이 많지는 않아요. 굉장히 자극적인 어떤 프레이밍에만 익숙해져서 ‘너 뭐하고 다니는 거야’, ‘일간 베스트(일베) 하는 거야?’라고 말씀하세요. 한국 사회에는 여성 혐오적인 이벤트가 많잖아요. 예를 들면 제사나 결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처음 페미니스트라고 느꼈을 때 가족들에게 ‘이건 페미니즘적으로 옳지 않다’고 아무리 말해도 전혀 설득되지 않더라고요. 제가 밖에서는 사회에 목소리도 많이 내고 그런 제 모습에 용기를 얻은 분들도 많으신데, 부끄럽지만 가정 내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은 포기 상태예요.”

국내는 해외와 다르게 여성 래퍼가 음악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것 같아요. 그런데 슬릭은 ‘페미니즘’이라는 그 틈새시장을 공략했다는 의견도 있어요.
“사실 제가 페미니스트를 선언하고 여성 인권 관련된 소수자 감성의 노래를 내기 전까지 시장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한 간에서는 저에게 ‘페미 코인 탔다’고들 하는데 그럼 제가 지금 부자가 돼 있어야죠. 페미 코인 자체도 없고요. 이처럼 저는 딱히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페미니즘을 하기 전에는 실력 있는 여성 래퍼로 주목받았어요.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한국 힙합 시장에서 착실히 인지도를 쌓다가 회의감을 느껴 제 스스로 시장을 버렸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나서 남성 서사 위주의 시선에 제가 갇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 봤을 때 3-4년 후에는 시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공략하실 분을 빨리 공략하세요.(웃음)”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개인 김령화로서는 음악으로 번 돈으로 노후 준비를 할 생각이에요. 저는 작년 가을부터 올해 초까지 슬럼프에 빠져 있었어요. ‘나는 왜 이러고 있지’,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등 생각이 많았죠. 그래서 올해는 쉬려고 했어요. 쉬면서 꼭 음악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나를 움직이고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가난해져서(웃음) 그래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해 인권 관련 행사를 열심히 참여했어요. 슬릭으로서는 이제는 스피커가 된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건 제가 만든 것 반, 사회가 변화한 것 반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인터뷰를 하고 있듯이 제가 어떤 말을 하면 들어주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앞으로는 제가 세상에 던질 수 있는 말들을 한 번은 크게 음악적으로 말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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