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폴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작가정신)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이수정 등 지음, 민음사)

고전영화 ‘가스등’. 여주인공이 남편의 교묘한 조종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하며 괴로워한다. 이 영화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나왔다.
고전영화 ‘가스등’. 여주인공이 남편의 교묘한 조종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하며 괴로워한다. 이 영화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나왔다.

 

범죄소설이나 범죄영화는 인기 높은 대중문화물이다. 하지만 진지한 서평이나 영화평에 이들이 대상이 되는 일은 많지 않다. 그저 시간 때우기용으로 소비되고 마는 게 보통이다. 내용도 판에 박은 듯 뻔하고 주인공들도 다 정형화된 인물들이다. 하지만 문화연구자 피스크가 말했듯, 대중문화 텍스트는 그 저급함이 지닌 내부적 모순 때문에 독자들이 자율적인 의미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타냐 모들스키가 여성들이 싸구려 연애소설을 읽는 행위에서 밝혀낸 것은 여성 독자들이 판에 박힌 연애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과 스토리 전개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거리두기를 통해 현실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연애 소설의 저급함이나 정형성을 비난하기 보다, 이런 소설을 읽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을 비난해야 한다는 모들스키의 주장은 이 연구가 나온지 근 40년이 되어가는 요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범죄소설의 외피를 입은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폴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작가정신)와 범죄영화에 대한 ‘독법’을 제공하는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이수정 등 지음, 민음사)은 범죄 피해로부터의 여성 안전에 대한 최근 우리 사회의 관심을 반영한다. 소설의 플롯과 영화의 서사는 ‘피해자’로 정형화되는 여성의 수동성, 나약함, 무력함이 왜 사회의 책임인지, 사법 질서는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지 강력하게 질문한다.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폴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작가정신)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폴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작가정신)

 

『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는 언니 레이첼을 만나러 가는 ‘나’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런던에 사는 젊은 여성인 나는 시골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언니를 만나러 간다. 기차를 기다리면서 나는 고향 부근에서 한 여성이 실종되었다는 TV뉴스를 본다. ‘언니는 그놈의 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첫 문단에 이 소설의 실마리가 들어있다.

나는 언니 집에 도착하자마자 핏자국을 발견한다. 핏자국을 따라가면 살해당한 언니의 시신이 있다. (흔한 사건이지…) 심드렁한 지역 경찰과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는 형사, 이런 저런 범행 동기를 가진 용의자들 모두 범죄 소설, 아니면 우리가 미드에서 질리도록 본 정형적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이러한 정형성 안에 날 선 질문들을 감춰둔다. 우리는 마치 간식 한 두 알을 킁킁 거리면 찾아다니며 즐거움을 얻는 노즈워킹 댕댕이처럼, 작가가 이곳 저곳에 뿌려 둔 문제의 씨앗들을 찾아낸다.

언니는 10대 시절 고향 마을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폭행을 당했다. 문자 그대로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언니는 그때 취해있었고, 시간도 16세 소녀가 다니기에 적절한 시간도 아니었다. 그래서 언니는 경찰로부터 신뢰도 보호도 받지 못했다. 그 사건 후 자매는 낯선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새로운 삶을 살려했지만, 자매는 결코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많이들 그래요, 자기를 때렸거나 강간한 사람이 자기가 아는 사람일 때, 피해자는 종종 가족들한테도 말을 안 합니다.” 15년 전 폭행 사건의 범인을 찾았을 때, ‘나’는 범죄 피해자인 여성이 어떤 위치에 처하는지를 깨닫는다. “만약 언니가 범인이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나한테 해버리면, 내가 어떤 식으로든, 설사 단 한 순간이라도 언니 잘못이라는 암시를 하는 날에는 언니가 날 용서하지 못 할 것”이라서 자신에게 말을 안했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스토킹을 범죄로 보지 않는 사법의 시각은 여성들이 살아가는 위험한 현실과 너무도 거리가 멀다.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이수정 등 지음, 민음사)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이수정 등 지음, 민음사)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은 여성을 피해자/희생자로 재현하는 수많은 영화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유익한 관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문제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범죄심리학자이며 스토킹의 형사범죄화 등을 요구하는 사회행동가인 이수정 교수(경기대)의 전문 지식과 영화저널리스트 이다혜의 풍부한 영화이야기가 잘 어우러졌다.

책은 ‘왜 피해자가 집을 나가야 하는가’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순응한다’ ‘이 문제가 곧 내 문제일수 있다는 연대 의식’ ‘만만한 계급을 향해 화풀이하는 경향’ ‘결국 가장 중요한 의제 강간 연령’ 등 5개 주제로 16편의 국내외 영화를 통해 여성에 대한 범죄 양태를 문제제기 한다. (이 가운데 12편을 봤으니 꽤 본 셈이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영화가 ‘가스등’. 요즘 여성에 대한 성착취/착취 범죄에 종종 등장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의 출처가 된 영화다. 영화 원제인 가스라이트에서 연원한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조작 대상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현상”(이수정)이다. 가스등화(化)된 셈이다. 그 결과, 가스라이팅을 행한 사람은 대상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된다. 부잣집 상속녀 폴라와 결혼한 앤턴은 교묘하게 상황을 조종하며 아내에게 화를 낸 뒤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폴라는 남편이 없을 때 집 안 조명(가스등)이 점점 어두워진다고 느끼지만, 남편과 일하는 사람 모두 “기분 탓”이라고 부인한다. 꺼질 듯 말 듯 어두워지는 가스등 아래 폴라가 느끼는 불안을 상징한다. 필자들은 이 영화를 ‘웹하드 성착취 양진호 사건’과 연결하며 여성들의 사회적 연대를 해결책의 하나로 제시한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다룬 ‘적과의 동침’ 폭력 남편을 살해한 것을 정당방위로 간주한 ‘돌로레스 클레이번’도 심도 깊게 논의하며, 2000년대 초 화제작 ‘번지 점프를 하다’를 그루밍 성폭력과 강요된 동반 자살로 비판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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