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교육권·직업권·
참정권 주창한 ‘여권통문’
교육 성평등은 이뤄졌지만
채용 성차별·성별임금격차·
유리천장 등 차별 여전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 ‘여권통문’
한국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 ‘여권통문’

9월 1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 선언문 ‘여권통문’이 발표된 지 122주년된 날이다. 여권통문이 나온 1898년은 고종 35년,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 2년, 그 해에 흥선대원군의 서거와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의 처형이 있었다. 나라 밖으로는 제국들의 각축전으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구한말 정세 속에서 북촌 양반가 여성들의 인권선언은 놀라운 뉴스였다.

같은 해 창간한 황성신문은 9월 8일자 1면에 여권통문 전문을 실으며 이렇게 알린다. “북촌 여성군자 수삼 분이 개명상에 유지하여 녀학교 설시하라는 통문이 있었기에 하도 놀라고 신기하여 우리 논설을 빼고 그 자리에 게재하노라.”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의 특징과 의미를 잘 드러내는 문서이다.

첫째, 여권통문은 세계적인 여성인권선언의 보편성을 갖추고 있다. 1848년 미국 뉴욕주 세네카폴즈에서 있었던 12개항의 여성인권 선언은 세계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이다. 약 40년 후에 조선부인들이 교육권, 직업권, 참정권을 주장한 여권통문은 세네카폴즈의 선언에 뒤지지 않는 보편적인 여권선언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1886년 이화학당, 1898년 배화학당의 전신인 캐롤라이나 학당이 개교함으로써 근대적인 여성교육이 시작되었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등을 통해 계몽주의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던 것도 여권통문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여권통문의 작성자들은 근대적인 교육을 접하며 만민평등, 천부인권 사상에 눈을 뜨고 이를 조선의 구국운동으로 연결하고자 했다.

둘째, 여권통문은 우리나라 근대적인 여성운동의 출발로 연결되었다. 여권통문을 반포한 여성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운동 단체인 찬양회(贊襄會)를 설립했다. ‘찬양’이란 ‘서로 도와서 길러준다’는 뜻으로 여학교의 후원 양성을 의미했다. 회장에 이양서당, 부회장에 김양현당, 사무원에 고길정당, 400여명의 회원이 있었고, 집회할 때 100여명씩 모이는 규모였다고 한다. 1899년 2월 찬양회는 50여명의 학생을 모집해서 승동에 순성여학교를 설립했다. 신교육을 받았던 찬양회 임원들이 주로 무급 교사로 일했다. 초보적인 한문교육과 함께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

사학자 이배용은 정부의 관립 여학교 설립 약속이 이행되지 않자, ‘관립여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된 때까지’라는 조건 아래서 찬양회가 순성여학교를 개교했으며 “이는 한국인의 의해, 특히 한국여성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라고 밝혔다. 회장단의 헌신으로 어렵게 운영되던 순성여학교는 1905년 대한매일 신보에 교장인 이신원(자현당 이씨)가 사임한다는 소식을 끝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돼 있다.

셋째, 여권통문에서 촉구한 여성의 교육과, 경제권, 정치참여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 122주년을 맞는 여권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는가? 김소사, 이소사들이 외쳤던 여성의 교육권은 이미 충분히 이뤄졌지만 그 교육을 받은 이후 생활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 취업 시의 성차별이 여전하고, 유리천장지수와 성별임금격차는 최악이다. 정치무대에서 여성의 소외도 여전하다. 여권통문 122주년의 의미를 살려 ‘여학교설시통문’ 앞에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보고서를 잘 써보자.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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