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빈(24) 등 일명 N번방 사건 주동자들은 자신을 속이고서 아동·청소년 등에 접근해 성착취했다. ⓒ여성신문
조주빈(24) 등 일명 N번방 사건 주동자들은 자신을 속이고서 아동·청소년 등에 접근해 성착취했다. ⓒ여성신문

 

지난 9월 14일 양형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안을 확정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양형위원회가 최고 29년 3개월형을 권고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해 온 활동가와 연구자이자 정치인으로서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에 실망했다. 

언론이 겨냥해야 했던 것은 최고 형량이 아니었다. 29년 3개월은 사법부가 솜방망이 처벌을 답습하지 말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겠다는 선언적 의미가 컸다. 그러나 양형기준이 법적 강제력을 갖지 않으며 판사들을 견제할 수단이 부족한 상황에서 최고형량이 선고될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언론은 무엇에 주목해야 했는가? 단연 벌금형과 집행유예였다.

디지털 성범죄의 기소율은 지극히 낮다. 텔레그램 성착취와 관련해 올해 3월부터 9월까지 총 1993명이 검거되었다. 이 중 검찰에 기소된 비율은 2%도 되지 않는다. 2018년 카메라등 이용촬영죄 위반으로 기소되어 구속까지 이른 비율은 고작 2.1%에 불과했다. 엄연한 불법촬영물이고 유포가 광범위하게 이뤄진 사건들조차도 기소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는 디지털 성범죄가 형사처벌이 필요한 중한 범죄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어렵게 기소가 되었어도 약 90%가 벌금형과 집행유예로 징역형의 테두리를 빠져나간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카메라등 이용촬영죄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들 중 전체의 60.4%가 벌금형을, 28.6%가 집행유예를 받았다. 아동청소년성착취물에서도 마찬가지다. 손정우가 운영한 웰컴투비디오 이용자들 중 42명의 1심 재판 결과를 살펴보면 84%가 벌금형을, 14%가 집행유예를 받았다.

김영란 대법원 양형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제104차 양형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김영란 대법원 양형위원장이 9월1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제104차 양형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벌금형의 경우 강제력이 약한데다가 피고인이 초범이거나 반성을 한다는 이유로 신상정보등록을 동시에 면제받는 일이 잦다. 집행유예의 경우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적용되는데 이번에 권고된 양형기준안에서 감경 범위에 해당하는 형량들은 모두 3년 이하다. 즉, 언론이 최고 형량 29년 3개월을 주목하고 있음에도 실상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가능성은 상당하다.

이번에 발표된 권고안에서도 집행유예 참작 사유로 ‘진정한 반성’이 명시되어 있고 그것의 기준이 구체화되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도 가해자들은 대필 반성문을 거래하며 형량을 낮추고 있다. 심지어 가해자들은 고도비만이라는 이유로 최저형을 선고받고, 유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재범방지 교육을 면제받는다. 그러므로 언론은 양형위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벌금형과 집행유예가 여전한 과제로 남았다는 점을 다뤄야 했다.

2016년, 여성들은 강남역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헌화를 하며 “수천송이 꽃을 놓는다해도 네가 걸었을 앞날보다 아름다울까”라고 했다. 2018년, 여성들은 혜화역과 광화문을 가득 메우며 “울지마 지워줄게, 죽지마 지켜줄게, 우리가 싸워줄게”라고 했다. 2020년, 여성들은 고작 최고형량에 대한 무작위적 보도를 보겠다고 이 싸움을 이어온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디지털 성범죄 문제는 원하지 않는 피해를 입지 않을 권리와 일상을 유지할 자유, 그리고 사법정의의 원칙인 공정성을 한 번이라도 경험하기 위한 겸허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남성에게만”이라는 구호는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지원 여성의당 공동대표.
이지원 여성의당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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