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정치인사이드] 한국 정치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W정치인사이드] 한국 정치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신지예 젠더폴리틱스 연구소장
  • 승인 2020.10.07 16:08
  • 수정 2020-10-07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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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정부 입법 예고안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법안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를 향한 의심과 공격
한국 정치를 퇴행시키는 일
낙태죄와 성폭력을 뛰어넘고 미래로 전진해야

내 친구는 술에 취하면 울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 내가 고백할 게 있어. 내가 옛날에 낙태를 했어. 친구는 이미 했던 고백을 다음 술자리에서도 하고, 또다시 했다. 매번 마치 어제 일어난 일인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

다른 친구는 갓 스무 살이 넘어 원치 않게 임신했다. 그 친구는 운이 나빴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했을 때였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집도하는 산부인과 의사들을 고발했다. 자연스럽게 수술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수중에 현금이 없던 친구는 이곳저곳에 돈을 빌렸지만 수술비용을 대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그는 수술비를 모으기 위해 임신한 채로 몇 개월 간 백화점에서 구두를 팔았다. 형법상 낙태죄가 제정된 뒤 이 땅에 태어나는 여성들은 이렇듯 피눈물을 삼키며 살았다. 그에 비해 정부는 낙태가 죄라면서 나라 형편에 따라 달라지는 고무줄 정책을 시행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9월29일 서울 중구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 기념 ‘269명이 만드는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9월29일 서울 중구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을 위한 국제 행동의 날 기념 ‘269명이 만드는 형법 제269조 폐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여성신문

1952년 형법상 낙태죄 제정 당시 정부를 비롯한 낙태죄 찬성론자들은 전쟁 직후 인구를 4천만까지 늘려 주권을 유지할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박정희 정부는 인구증가가 가난의 이유라면서 산아제한정책을 펼쳤다. 낙태죄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공임신중절수술과 복강경피임수술을 하는 낙태버스를 돌리기도 했고, 문둥병이라고 비하받던 한센병 환자들을 ‘단종'시킨다며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낙태 수술을 단행했다. 2000년이 되어 저출산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출산장려정책을 펼쳤다. 이렇게 형법상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은 정부가 인구정책 구상에 따라 마음대로 휘두르는 칼이었다. 할머니, 어머니, 나까지 이어지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여성들이 낙태죄 아래서 고통받았다. 이것이 국가폭력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건강권, 의료접근권 등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지만 임신중지에 관련해서는 국가가 정한 죄여서 통계조차 없다. 선진화된 수술법이나 약물 등도 도입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성교육과 양육 지원정책, 한부모 지원정책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국가가 당연히 해야할 일들을 하지 않은 채 낙태가 죄라며 여성을 낙인찍고 손가락질하며 응당 국가가 해야할 책임을 회피해온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1년 반이 지나서야 관련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14주까지는 임신중단을 허용하지만 이후에는 전문가 상담을 받아 숙려기간을 거쳐 사회경제적사유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결국은 낙태죄를 존치시키겠다는 입장인 것이다. 사회경제적사유는 가난하면 임신중지를 해도 된다는 자본주의적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고, 24시간 숙고 기간을 강제하는 과정은 여성의 판단 능력을 의심하고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일이다. 이것은 페미니스트를 자임한 대통령이 내놓을 수 있는 법안이 아니다. 낙태를 죄라고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는 그 어디에도 없다. 다행히도 권인숙 의원이 정부 개정안을 “명백한 역사적 퇴행"이라며 비판하고 낙태죄 전면 폐지를 담은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수십 년 전 낙태죄를 제정한 과거를 이번에는 반복하지 않길 바란다. 낙태죄 전면 폐지뿐 아니라 여성의 재생산권을 보장할 수 있는 여성 재생산권 특별법 등으로 별도 제정할 필요가 있다.

ⓒ유튜브
강성범 유튜브 캡쳐 ⓒ유튜브

한국 사회의 역사적 퇴행을 보여주는 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박원순 전 서울 시장의 성폭력 사건이다. 박 전 시장이 사망한지 백일이 다 되어가지만 일부 사람들은 아직 ‘박원순의 실패’를 받아들이기 거부하고 있다.

개그맨 강성범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고소인의 변호를 담당하고 있는 김재련 변호사를 아줌마’라고 부르며 조롱한다. 개인의 일탈 뿐만이 아니다. MBC 방송사는 취재기자 입사시험 논술시험에서 “박 전 서울시장 성추행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를 피해자라고 칭해야 하는가, 피해호소인이라고 칭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출제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외에도 김재련 변호사의 이력을 내세워 박근혜 정권 사람들의 배후설을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언론인도 나오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조국 전 장관을 지지하지 않으면 토착왜구 세력이고, 추미애 장관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을 제기하면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정치공작을 펼치는 박근혜 세력이 되고, 북한에 의해 피살된 어업지도원 문제를 제기하면 남북관계를 훼손시키려는 반통일주의 냉전 고착 세력이 된다. 문제 자체에 대한 응답은 어디에도 볼 수 없고, 문제 제기 자체를 문제 삼는 일로 답을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박원순 전 시장은 2009년 국정원 사찰과 관련해 “진실은 이렇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자신을 둘러싼 전방위적 조사와 관련해 심경을 토로한 이 글에서 그는 “민주주의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라며 “아무리 기나긴 노고와 투쟁의 끝에 얻은 인권과 민주주의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관심이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고,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순간, 그것은 사라지고 만다”며, 이명박 정권 하에서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상황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분석하고 반성하며 이 사회의 대안을 위해 싸우겠다고 결의한다. 이는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다 실패할 수 있다. 크거나 작거나 실패하지 않는 삶이란 것은 어디에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 완전무결한 인간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한다. 지금 성폭력 피해 호소와 진실 규명 요구를 박원순 죽이기로 받아들이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이야 말로 실제로 살아있었던 자연인 박원순을 부정하는 일이고, 그의 삶 자체를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2015년 이후 미투운동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변화를 역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귀에 듣기 나쁜 말을 틀린 말이라고 매도하는 행위, 성폭력 피해자와 조력자가 공격받는 세상을 민주공화국이라고 부를 순 없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본부 정문 앞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다.
Freedom is the price of permanentize vigilance (자유는 영원한 감시의 대가이다)

공화국 시민이 권력자를 감시하는 것은 권리이자 의무이고, 의무이자 권리이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이 시민들에게 어떻게 버림받았고,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지 얼마 남지 않은 문재인 정부의 사람들이 잊지 말길 바란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시간이 낙태죄와 성폭력으로 점철된 시간을 뛰어넘어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흐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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