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시절 박에스더.
유학 시절 박에스더.

 

1893년 5월 24일 결혼한 후 여전히 점동은 의료에 열심이었다. 봄부터 남편과 평양에서 여성들을 위한 의료를 계획하고 있던 로제타를 따라 점동도 평양으로 의료선교를 함께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로제타가 출산을 앞둔 상황이어서 여전히 서울 보구여관에서의 의료활동에 매진하였다. 1893년 11월 10일 로제타가 셔우드 홀을 출산하고 시간이 조금 흐른 1894년 5월 4일, 로제타와 점동은 제물포항을 떠나 평양으로 가는 고기잡이배에서 고생 끝에 5월 8일 평양에 도착한다. 평양 관아의 박해가 가해지는 어려운 중에 잠시 환자를 돌보다가 동학농민봉기 등 정치사회적 문제로 평양에서 철수하고 6월 11일 제물포로 귀향한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주와 박해를 겪고 청일전쟁의 한 가운데 점동은 1894년 9월 초 1.8 kg의 남아를 조산하게 되는데 태어난 지 36시간 만에 사망하는 슬픈 경험을 한다. 평양이 청일전쟁의 전투장이었던 터라 윌리엄은 서둘러 10월 1일 평양으로 떠났고 10월 8일 도착하여 분주히 부상자들 치료를 하게 되었다. 지속되는 격무와 말라리아 감염으로 다시 서울로 오게 되는데 11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윌리엄 홀은 로제타의 정성을 다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11월 24일 결국 영면하였다. 남편 사망 후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로제타에게 점동도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청하였고 미국 선교부 도움을 요청하여 점동 가족도 함께 미국에 가기로 결정되었다.

1894년 12월 7일 임신한 상태의 로제타 홀은 아들 셔우드 홀과 김점동 부부와 함께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향한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행 기차를 타고 1895년 1월 14일 로제타의 고향 리버티 집에 도착하였다. 

박에스더는 19세에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학생으로 입학한다.
박에스더는 19세에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학생으로 입학한다.

 

미국에서의 에스더, 김점동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로제타는 딸 이디스(Edith Hall)을 출산하였고 점동은 로제타 옆을 지켰다. 의과대학 입학을 하기 위해서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여 미국에 정착하자마자 2월 1일 리버티 공립학교에 입학하여 미국 고등학교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 관습에 따라 박에스더로 불리게 된다. 남편 박여선이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결혼기간은 7년 뿐이었고 미국에서의 생활은 단지 5년간이다. 그 시기도 떨어져 산 기간이 많다. 5년간의 미국에서의 이름이 그 후에도 계속되는 것에 한국인인 필자는 동의가 선뜻 안되어 이 특집 처음에도 이미 언급했지만 우리 김점동 선생님의 한국 존함을 찾아드리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호에서 지적한 바, 필자는 13세에 자신이 선택한 세례명인 ‘에스더’에 주목하는데, 소녀시기에 자신이 선택한 ‘별: 에스더’에 점동은 큰 의미를 두었으리라는 짐작이다. 또한 미국체류 시기에는 에스더로 불리웠을 것이므로 자신이 선택한 이름, 에스더로 이제 칭하기로 한다.

에스더는 주중에는 리버티 시내에서 기숙하며 공립학교를 다녔고 주말에는 로제타 아버지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남편 박여선은 농장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아 에스더의 공부를 도왔다. 방학이 되어 가족 모두가 캐나다의 윌리엄 홀 부모님 댁을 찾아, 5주간 머물며 근처 교회들에서 한국 경험을 이야기는 가운데 그들이 에스더의 학비 모금도 해주었다.

다시 리버티로 돌아온 후 1895년 10월 1일부터 에스더는 뉴욕시의 유아병원에서 일년 가량 수간호사보조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면서 의대 입학을 위한 라틴어, 물리학, 수학 등을 개인과외를 받으며 열심히 준비했다. 그러한 가운데 두 번째 조산으로 아이를 잃게 되었다. 1896년 10월 1일, 드디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Baltimore Women’s Medical College)에 19세 최연소 학생으로 입학했다.

한편 1896년 9월 로제타는 뉴욕에 있는 국제의료선교회에서 일하게 되어 박여선과 아이들과 함께 뉴욕에 이주하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로제타와 친지들의 도움으로 1897년 2월 1일 ‘윌리엄 홀 기념병원(일명 기홀병원)’이 평양에 개원하게 되었다. 로제타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계속 의료선교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에스더의 어려움도 알고 있는 터라 에스더에게도 한국에 함께 가기를 물었으나 에스더는 강한 의지로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며 학업을 마치겠다고 로제타에게 편지를 썼다. 로제타는 아들 셔우드와 딸 이디스를 데리고 1897년 9월 6일 한국으로 떠난다. 에스더의 의업에의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는 편지는 다음과 같다.

“저는 당신이 저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한국으로 돌아가 제가 준비될 때까지 우리의 불쌍한 자매들을 도왔으면 합니다. 저는 하느님이 저를 돕기 위해 훌륭하고 헌신적인 친구를 보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 이것을 포기하면 다른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한 후에도 배울 수 없다면 그때 포기하겠습니다. 이전에는 아닙니다.”

교육받은 지성적 여성의 당찬 포부였다. 그렇다. 에스더는 20세 비교적 어린 나이임에도 인생을 자신의 선택으로 나아가겠다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할 것을 천명한다.

이렇게 열심히 의학수업에 몰두해 있는 에스더에게 1899년, 졸업을 한해 앞둔 시점에 에스더를 물심양면 지원하던 남편 박여선이 폐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에스더는 독지가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낮에는 의학공부를 하며 남편의 병원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남편 병간호도 해야 했다. 에스더의 치열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 박여선은 에스더가 졸업시험을 3주 앞둔 시점인 1900년 4월 28일 사망하게 되었다. 볼티모어 로렌 파크 공동묘지에 묻혔다. 결혼한 지 만 7년이 안 된 시점이고 에스더 나이 23세였다. 이 슬픔에도 졸업시험을 잘 통과한 에스더에게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이를 거절하고 한국 여성과 국민을 위해 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졸업과 함께 귀국한다. 1894년 12월 7일 서울을 떠난 이후 6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감하고 의사가 되어 미국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의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900년 10월 귀국하였다. 

1900년대 초 기홀병원 전경.
1900년대 초 기홀병원 전경.

 

귀국 후 평양 기홀병원에서의 의료활동

귀국한 에스더는 바로 로제타가 일하고 있던 평양의 광혜여원으로 가서 합류한다. 한편 1897년 11월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던 로제타는 서울 보구여관에서 환자를 진료하다가 1898년 5월에 가족 모두 평양으로 이주하였는데 가자마자 세 가족 모두 이질(Shigellosis)이 걸려 이때 딸 이디스를 잃게 된다. 슬픔 중에도 ’기홀병원‘은 1898년 평양의 여성병원인 광혜여원을 개원하고 이어서 이디스를 추모하며 1899년 이디스 마거릿 어린이 병동을 개설했다. 미국체류기간 동안 한국의 맹인들을 위한 특수교육 공부까지 한 로제타는 평양에 맹인학교를 세우고 이어 외국인 학교도 설립했다.

에스더가 평양에 도착하고 10개월간 로제타는 간간히 모든 일을 에스더에게 맡기고 지방 선교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평양에서의 그 기간 동안 진료한 진료건수는 2,414건에 달하여 에스더의 큰 역할을 엿볼 수 있다. 시작은 보조의사였으나 로제타가 에스더를 얼마나 믿음직한 동료로 의지하고 있었는지 로제타의 일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로제타가 격무로 쇠약해진 바람에 1901년 3월에는 에스더에게 모든 일과 아들 셔우드도 전적으로 맡기고 요양을 위해 서울로 간다. 로제타는 요양을 위해 안식년으로 미국에 1901년 6월 7일 돌아가게 되고 그동안 보구여관을 맡았던 여의사 메리 커틀러도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게 되어 보구여관을 에스더가 책임지게 된다. 평양 광혜여원은 당시 동대문 진료소를 맡고 있던 릴리언 해리스(Lillian Harris:1865-1902)가 맡게 이동결정이 되었다. 

132년 전 세워진 우리나라 첫 여성 병원 ‘보구여관’.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우리나라 첫 여성 병원 ‘보구여관’.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다시 보구여관으로…

1901년 7월부터는 어린시절 의학에 눈떴던 보구여관의 책임의사로 에스더가 부임하여 환자들을 치료하게 되었다. 왕진도 활발하였다. 보구여관 지소 여의사 엠마 언스버거(Emma F. Ernsberger, 1862-1934)와도 서로 돕고 세브란스병원의 의사 에비슨의 도움도 받으며 보구여관을 운영하였다. 진료하는 외에도 한국의 상황이 미신적 치료에 많이 의존하는 환자들 현실에 보건교육도 함께 열심히 했다.

1902년에는 콜레라가 창궐하여 많은 죽음이 있었다. 적극적인 치료를 위하여 전도부인과 환자들 집까지 방문하여 약을 주며 치료에 앞장섰다. 보구여관 진료사업은 나날이 확장되었다. 이해, 에스더가 진료한 건수가 130여 왕진과 1,230건의 초진, 2,017건의 재진 등 총 3,377건이었다. 에스더는 업무시간은 물론 끝난 시간에도 진료를 마다하지 않았고, 일요일까지도 치료에 임했다. 휴가 때마저도 매일 집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때 에스더의 의료활동에는 전도부인인 데레사와 두 조수 김배세(김점동의 동생), 이그레이스가 있었다. 1903년 서울 보구여관 근무 말미 시기에는 간호원 양성소를 만드는 임무를 띠고 입국한 간호선교사 마거릿 에드먼즈(Margaret J. Edmunds, 1871-1945)의 간호원 양성소 설립과정을 도우며 관여하게 된다.

1903년 3월 20일 안식년을 마치고 여의사 커틀러가 보구여관으로 돌아오자 에스더는 다시 평양으로 간다. 1903년 에스더가 로제타와 함께 한 진료건수는 입원, 왕진, 외래 합하여 4,857건을 치료했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으로 혼란하여 평양을 피해 잠시 서울로 왔다가 시국이 안정되자 곧 평양으로 귀환한다. 이 해, 두 의사 진료건수는 8,638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료의 내용은 안과 질환이 가장 많고 피부병, 귓병, 부인병, 치아병 등의 순이다. 방광질루 수술들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도 하였다.

에스더는 진료뿐 아니라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이때 성경과 위생강의를 동시에 했다고 한다. 전도사업을 위해 일년에 수백군데를 다녔다고 하니 얼마나 열심히 하느님 사업을 위해 일했는지 추정할 수 있다. 1903년 가을에는 여성해외선교회로부터 선교활동지역으로 황해도 700리를 할당받았다고도 한다. 최선을 다하는 활동에서 주민들 삶에 열정과 정성을 다한 자신의 행동으로, 교육으로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을 것이다. 선교활동과 의료활동의 와중에 건강을 차츰 잃게 된 에스더는 1905년에는 폐결핵으로 자리에 눕게 된다. 9월 요양차 중국 남경으로 갔다가 돌아와서는 간헐적으로 의료, 전도사업에 임하다가 몸이 더 쇠약해지면서는 번역, 주일학교 일을 돕는 역할들을 하게 되었다.

1909년 4월 28일 언더우드, 윤치호, 김필순 등의 발의로 외국에서 유학한 후 헌신적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박에스더, 윤정원, 하란사 3인이 초청되어 ’초대 여자 외국 유학생 환영회‘가 열렸다. 내·외빈 700여명이 참석한 환영회였다.

1909년 가을 성경학교를 마지막으로 에스더는 평양에서 서울로 와서 작은언니 신마리아 집에서 1910년 4월 13일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귀국 후 최선을 다하여 한국민들을 치료하고 교육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전하던 김점동, 박에스더가 결국 진료현장에서 폐결핵에 걸려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활동을 간략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필자: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 17대 국회의원
필자: 안명옥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전 국립중앙의료원 원장, 17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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