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탐구-W초대석]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도울 수 있는데 왜 안하나”
[리더십 탐구-W초대석]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도울 수 있는데 왜 안하나”
  • 박성희 전문위원 / W경제연구소 대표
  • 승인 2020.11.05 16:37
  • 수정 2020-12-04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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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탐구-W초대석]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45세 실직, 돼지·모래로 인생전환, 766억 기부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사진=카이스트 제공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카이스트

 

“8남매의 막내에요. 아들 넷, 딸 셋이 있었는데 친구 딸이 교사인 게 부러웠던 아버지가 딸 하나만 더 낳자고 어머니를 졸라 내가 태어났답니다.” 84세, 암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는데도 목소리엔 힘이 넘치고 기억력은 탁월했다. 몸무게 38kg이었다는 대학 시절 가녀린 모습은 없었지만 웃을 때면 여전히 소녀같은 데가 있었다. 호탕함 속에 귀여움이 섞인.

사법시험 실패, 신문기자로 출발
4개월만에 견습 못떼고 쫒겨나

지난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676억원을 기부, 201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총 766억원을 출연, 세상을 화들짝 놀라게 한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자 카이스트발전재단 이사장. 소망 끝에 얻은 막내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극진했다. “아버지가 하도 안고 있어서 어머니가 업을 틈도 없었답니다.” 당대 최고의 명문인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대학 3학년 때 법조인으로 살려면 돈에서 자유로와야 한다며 서울 종로구 필운동 집의 등기를 딸 앞으로 돌려줬다. 경제기자로 이름을 떨치면서 재벌 총수들과 지인처럼 지내고, 신문사를 떠난 뒤엔 사업가로 승승장구했다. 82세에 대학 동기와 결혼해 금슬을 자랑한다. 
 
꽃길만 걸었다 싶다. 그러나 관훈클럽 초대석(10월 29일, 정신영기금회관)에서 직접 듣고, 자서전(왜 카이스트에 기부했습니까)을 통해 들여다 본 이 회장의 삶은 모래와 자갈, 진흙 투성이였다. 일제 치하인 1936년 태어나 중학교 1학년 입학 직후 6.25를 겪었다. 피난 길에 사람들이 따발총에 맞아 죽어가는 걸 목도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사법시험에 도전했지만 낙방했다. “선풍기도 없는 도서관에서 밤낮 없이 공부하자니 땀띠 범벅에 몸 곳곳이 망가졌어요. 남학생들은 팬티만 입고 있기도 했는데 나는 그럴 수 없잖아요. 처음 맛본 실패의 고통은 상상이었어요. 손까지 뻣뻣해지고.”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기 위해 다니던 영어학원 게시판에서 신문기자 채용 공지를 보고 응시했다. 함께 시험을 치른 법대 동기 중 유일하게 합격했지만 사내 파벌싸움과 스펙 좋은 여성에 대한 주위의 질시가 겹쳐 견습 딱지도 못 떼고 쫓겨났다. 두 번째를 거쳐 세 번째 입사한 서울경제신문에서 경제기자로 이병철(삼성) 정주영(현대) 김용완(경방) 회장 등 재계 총수들과 격의 없이 지냈지만 1980년 제5공화국의 언론통폐합 때 해직됐다. 

이수영 회장의 여기자 시절 모습 ⓒ카이스트 발전재단
이수영 회장의 여기자 시절 모습 ⓒ카이스트 발전재단

트랙터 몰고 흙먼지와 사투
조폭에 쫓겨 도망 다니기도

40대 중반에 일터도 잃은 미혼여성. 막막했을 법한데 그는 다시 일어섰다. “아버지께서 집과 함께 주신 통장 2개가 있었어요. 서른다섯살 때 통장을 헐어 안양 하천부지를 샀어요. 주말이면 내려가 농사를 짓다가 누가 돼지를 키워 보라고 해서 2마리를 데려왔어요,” 이렇게 시작한 목축업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퇴직 후 그는 목장 일에 전념했다. 트랙터를 몰고, 옥수수를 재배해 사료를 만들고, 똥오줌을 치우고. 

돼지 2마리가 1000마리로 늘어나고 젖소도 10마리로 불었다. 목장 땅 절반 이상이 도로 건설로 수용 당하자 이번엔 모래 채취 사업에 뛰어 들었다. 여름이면 뜨거운 햇살 겨울이면 차가운 안양천 강바람을 맞으며 흙먼지와 씨름했다. 돈이 모아지자 여의도백화점이 있던 서울 여의도 맨하튼빌딩의 5층을 매입하고 부동산업에 뛰어 들었다. 이 또한 가시밭길이었다. 

“계약하고 건물에 가보니 오래 전에 영업을 중단한 점포마다 쓰레기와 버려진 집기가 가득했어요. 직원에게 지렛대와 망치를 사오게 한 다음 아르바이트생을 구해 1주일동안 함께 부수고 치웠어요. 관리인은 철거에 3000만원 든다고 했지만 300만원에 다 정리했지요.” 

창이 없어 어둡던 건물에 조명을 밝히고 화장실을 주방보다 깨끗하게 만들어 임차인들이 얻고 싶어하는 건물을 만들었다. 문제는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건물 관리업체 선정을 둘러싼 싸움에 끼어든 조폭들이 서로 자기편을 들어달라며 협박하는가 하면 기존 업주에게 받지 못한 관리비를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렸다. 심지어 “알아서 하라”고 위협했다. 하는 수 없이 피신하면서도 은행에 돈을 맡겨 관리비를 꼬박꼬박 지불했다. 이 회장은 “내게 부동산이 붙어요”라고 말했지만 결코 그냥 붙은 게 아니었다. 그의 성공은 용기와 배짱, 신용의 결과였다.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오른쪽)이 지난 7월 23일 KAIST 본교 학술문화관에서 기부 약정식을 갖고 있다. 이날 이수영 회장은 KAIST에 676억 원의 사재를 출연했다. ⓒ카이스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오른쪽)이 지난 7월 23일 KAIST 본교 학술문화관에서 기부 약정식을 갖고 있다. 이날 이수영 회장은 KAIST에 676억 원의 사재를 출연했다. ⓒ카이스트

 

위기 때마다 결단·끈기로 정면 돌파
이병철 회장 인터뷰, 경제기자로 명성

그는 인생의 고비 때마다 주저앉는 대신 활로를 찾아 결단하고 실천했다. 돼지 파동으로 돼지값이 폭락하자 국군장병 위문품이라는 길을 뚫었다. 우유 파동 땐 초등학교 급식이란 활로를 개척했다. 그에겐 인맥을 활용하는 지혜가 있었고, 필요할 땐 남에게 손 내밀 줄도 알았다. 부끄러워 도와달라는 말을 못해 무너지지 않았다.

집념과 끈기도 대단했다. 서울경제 기자 시절 재벌 총수 취재로 이름을 날린 것도 상대가 누구든 만날 방법을 찾아내는 집념과 끈기, 배짱 덕분이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 인터뷰 때만 해도 그랬다. 이병철 회장은 어느 언론사 그 누구와도 인터뷰를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사업 얘기가 아닌 골동품 수집에 관한 인터뷰라고 했지만 비서실에선 영락 없이 퇴짜를 맞았다. 

“당시 출입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홍재선 회장에게 다리를 놔달라고 했어요. 성사됐지만 혹시라도 취소하면 어쩔까 노심초사했지요. 약속시간 정각에 등장한 이 회장이 골동품을 안 보여줄까 봐 만난 순간 ‘물건은 어디 있어요’라고 물었어요. 이병철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 중엔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 씨가 생활고 때문에 일본인에게 판 것도 여러 점 있어요. 덕분에 우리의 소중한 유물들을 지킬 수 있게 된 거에요. ” 

이병철 회장 인터뷰가 나가자 다른 재벌 총수 인터뷰는 수월해졌고, 부탁하는 일이 없다 보니 여러 기업 총수들과 격의 없이 지냈다. 사업보국을 강조하고 기부에 힘썼는데도 갑자기 빚에 몰려 잠적한 동양시멘트 이양구 회장을 인터뷰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땐 수소문 끝에 그와 가깝다는 강원용 목사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새벽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요. 당직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자고 있던 사진기자를 깨워 동행했지요.” 그렇게 이양구 회장의 전후좌우 사정을 세상에 알려 궁지에 몰린 이양구 회장과 동양그룹을 구했다. 

목축업과 모래채취 사업으로 돈이 모이자 서울 여의도 맨하탄빌딩 5층을 인수했다. 1988년 그의 나이 52세 때였다. 조폭들에 시달리면서도 운영을 잘해 다른 층도 계속 사들여 빌딩관리단 회장이 되고, 미국에 진출해 LA 도심 빌딩도 구입했다. 용기와 배짱, 근면과 알뜰함으로 차근차근 모은 돈으로 2012년부터 지난 7월까지 카이스트에 766억원을 기부했다.  

이 회장의 삶은 ‘파란만장’이라는 상투적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 경기여고와 서울대법대라는 스펙 및 법조와 경제계 인맥 덕도 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936년 생이다. 이 땅 사람 대부분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다. 뿐이랴. 20~30대를 보낸 1950~60년대까지 여자는 아침 일찍 남의집이나 가게에 가면 ‘재수 없다’ 소리를 듣는 2등 국민이었다. 70~80년대에도 여성은 여자라는 그 자체로 약점이었다.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지난 10월 29일 관훈클럽 초대석에 참석해 강연 후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성신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지난 10월 29일 관훈클럽 초대석에 참석해 강연 후 관계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여성신문

 

과학기술이 대한민국 살 길
노벨상 뭐가 그리 어렵나

그러나 그는 일생동안 여자라는 한계를 뛰어 넘으며 살았다. “아버지가 뭐라고 해도 무조건 복종하는 어머니를 보며 생각했어요. 힘 센 여자가 되자. 팔다리에서 나오는 힘이 아닌 다른 힘을 지닌 여자가 되자 싶었지요.” 어린 시절 다짐 덕이었을까. 그는 인생의 고비고비를 기회로 바꾸면서 힘 있고 존경 받는 여자가 됐다. 운이 따르고 재복도 있었겠지만, 그 바탕엔 결단과 실천, 근면과 절약이 있었다. 어떤 일이건 죄다 팔 걷어부치고 직접 하고 휴지 한 장도 아꼈다. 그는 지금도 아침마다 어김 없이 사무실로 출근하는 현역이다. 

기부의 계기는 단순했다. “미국 LA빌딩을 매입할 때 상속자 지정란이 있는 걸 보고 고민하다 카이스트에 유증하기로 작정했어요.” 766억원이라는 거금을 왜 모교가 아닌 카이스트에 기부했느냐에 대한 답도 간단했다.

“세계 각국 공항에 가보세요. 삼성 간판이 없는 곳이 없어요. 과학인재 양성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이에요. 모교에도 기부했지만 받은 만큼 돌려주려는 생각이 덜한 듯해 회의가 들었지요.” 초근목피 시절과 쌀이 없어 혼분식 장려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 도시락 검사를 하던 한국이 이만큼 잘 살게 된 건 과학기술 발전 덕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최근에 매입한 건물까지 더 출연해 1000억원 정도로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을 설립, 카이스트를 중심으로 과학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뒤늦은 결혼에 대해서는 “첫사랑이라는 건 오보에요. 남편의 짝사랑이었지요. 어쨌거나 약도 잘 챙겨주고 밤에 잘 때 불도 꺼줘서 좋다”라며 행복해 했다. 기부도 남편이 “언제 할 거냐, 기왕 할 거면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고 말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데 왜 안하겠냐. 교육 특히 인성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수영 회장. 그가 털어놓은 인생은 ‘도전과 응전, 용기와 배짱, 집념과 끈기, 근면과 절약’으로 점철된 험로였다. 힘센 여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당당하고 지혜롭게 걸어온 그의 길은 대한민국의 발전사요, 여성의 인생 개척사요, 이 땅 여성의 미래를 위한 지침서였다.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1936년 출생. 서울대학교 법학과 졸업. KAIST 명예박사.
서울신문 기자(공채 10기), 한국경제신문/서울경제신문 기자, 맨하탄빌딩관리단 회장, 서울대법대장학재단 이사장, KAIST발전재단 이사장, 국민훈장 목련장 서훈, 자서전 ‘왜 카이스트에 기부했습니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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