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점동(박에스더), 여자의사 120년] (끝)

로제타 홀 일기
로제타 홀 일기

 

1945년 2차대전이 끝나고 미군정 시기를 지나 우리나라는 현 대한민국의 모습으로 빠르게 발전해 왔다.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는 여의사로 시작된 여성 과학자의 발전 면모가 차츰 의사뿐 아니고 여러 과학 분야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의료계에서는 의학, 한의학, 간호학, 약학 분야에서 나날이 통섭화와 세분화가 동시에 진행되어 생명과학(life science) 분야에서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활약하고 있으며 개괄적으로는 이공계 STEM(Science·Technology· Engineering·Mathmatics) 영역에서 여성 과학자들은 눈부신 약진의 선봉에 있다.

의학교육 영역을 살펴보면 1945년 이후 75년 동안 6개의 의과대학이 40개의 의과대학이 되었고 한해 3000여명의 의사가 배출되고 있다. 다시 한 번 복기하자면 대한민국 전체 의사는 2020년 현재 12만9334명, 여성의사 3만4316명으로 26.5%에 달한다(2020년 초 국가고시 합격자까지 포함.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통계, 보건복지부 통계는 2018년까지 공식 발표). 1945년 해방 이후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우리나라의 ‘김점동(박에스더) 근대 서양의학 여자의사 120년’의 간략한 역사를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격동기 여성의학교육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과 동시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일본인 운영은 막을 내리고 바로 8월 16일자로 정구충 박사가 학장에 취임했다. 원래 설립 목적이던 한국 여성 의학교육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45년 9월 29일에는 제4회 졸업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37명 졸업생에게 처음으로 우리말로 된 졸업장이 수여됐다. 일본인 재학생에게는 8월 15일부로 졸업장과 재학증명서를 교부해 거취를 결정하도록 했다. 1947년 10월 7일에는 여자의과대학으로의 승격을 위한 의견취합 동창회 개최 등 노력을 지속하여 결국 1948년 5월 22일 서울여자의과대학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45년 해방 당시, 즉 일제 강점기 말기까지 의학계 고등교육기관은 경성의학전문학교(1916년),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1917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1926년), 평양의학전문학교(1933년), 대구의학전문학교(1933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1928년)에서 발전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38년)로 6개의 의료교육기관이 있었다.

해방 후 미군정 시기, 미국식 의료체제를 받아들이며 의학교육이 6년제가 되면서 의학전문학교가 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일제가 만든 관립 의학교육기관은 모두 폐지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설립 주체가 된 새로운 의학교육기관이 서울, 대구, 광주에 세워졌다. 서울은 경성제국대학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가 폐지되고, 1946년 8월 국립 서울대학교의과대학이 설립되었다. 대구의학전문학교는 1945년 9월 대구의과대학으로, 광주의학전문학교는 1946년 9월 광주의과대학으로 세브란스는 6년제로 개편되면서 1946년 처음으로 예과학생을 모집하였고, 1947년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1948년 5월 서울여자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화여자전문학교는 1945년 10월 이화여자대학교로 승격될 때 의학부와 약학부가 설치되면서 이화여자의과대학 시대를 열었다.

이화의대는 1886년 이화학당이 설립된 후 1887년 이화학당 내 개설된 보구여관을 대학 역사의 뿌리로 삼고 있다. 로제타 홀이 1891년에 이화학당 학생 5명에게 처음으로 진료 조수 양성을 위한 여성의학교육을 실시했던 곳이 바로 보구여관이고 이화의대 동대문병원 전신이기도 하다. 이화여자대학교의료원은 개원 기념일을 보구여관에서 메타 하워드가 첫 진료를 시작한 1887년 10월 31일로 정해 매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문교 당국은 서울시내 모든 대학에 연합 단일대학으로 운영토록 하는 전시 특별 조치령을 내렸고 1951년 1월 4일 부산으로 정부 중심을 옮기며 정부기구 뿐 아니라 교육기관들도 본부를 지방으로 옮겼다. 전시 연합의과대학은 부산에서 1951년 2월 18일 처음 개강했고, 뒤이어 대구, 광주, 전주, 대전에도 연합대학이 설치되어 합동수업을 하였다. 의학교육도 합동교육을 하게 되었고 부산전시연합대학에 참여한 의과대학은 서울대학교, 서울여자의과대학, 세브란스의과대학 등이 참여했다. 

지난 2000년 10월 6일 한국을 방문한 로제타 홀 가족 모습. 사진=안명옥
지난 2000년 10월 6일 한국을 방문한 로제타 홀 가족 모습. 사진=안명옥

 

한국전쟁 후 안정기로 들어서며

1948년 6년제 의대가 된 서울여자의과대학은 로제타 홀을 비롯한 여의사들과 국가발전을 도모한 조력자들 도움으로 우리나라 여성의학교육의 시작이며 중심이 되어 1928년 여자의학강습소에서 발전하여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시대를 거친 발전이었다. 명실공히 대한민국 근대사 여성의학교육 중심이었다. 그 후 서울여자의과대학교는 1957년 남녀공학으로 개편되면서 수도의과대학으로 개칭되고, 1967년 3월 1일에는 국학대학과 산학원 인수과정을 거쳐 종합대학인 우석대학교가 되었다. 우석은 경성여의전 창설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호남 부호 김종익의 호다. 학교법인 우석학원은 거듭되는 재정난으로 1971년 12월 9일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과 병합하여 오늘의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광복 후 6・25전쟁이 끝난 1960년 이전의 우리나라 의학교육기관은 서울의대, 연세의대, 서울여의대(수도의대, 고려의대), 이화의대, 경북의대, 전남의대, 가톨릭의대, 부산의대 등 8개교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여성의학교육기관인 이화의대와 남녀공학으로 전환된 수도의대를 제외한 타 대학에서는 여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극소수였다.

한국 여자의사들의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

선의와 사랑의 마음으로 열정과 정성을 다하여 공동선을 위하여 사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대한민국 근대여성의료사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소중한 외국인 로제타 셔우드 홀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기원전 로마의 시인 베르질리우스의 시,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한다(Omnia Vincit Amor!)”의 사랑 자체였다. 미국인 선교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1865년 9월 19일~1951년 4월 5일)은 우리나라 여성의학교육의 길을 개척한 주인공이다. 로제타 홀은 1890년 25살 처녀로 미국에서도 희소한 의사로 모든 보장된 미래를 뒤로하고 의료선교사로 조선을 찾은 뒤 43년간 조선 땅에 머물며 조선 여성들 건강과 교육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헌신한 여성이다. 그녀의 삶에는 ‘한국 여의사의 어머니’ 등 존경의 수식어가 따른다. 당연한 일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2000년 10월 6일 로제타 홀 가족들 방한 때 만나서 로제타를 회상하는 환담에 함께 할 수 있던 우연했지만 특별한 기억이 있다.

로제타 홀이 여자의학교육에 미친 영향은 직접적이고 지대했다. 로제타 없이 의사 김점동(박에스더) 탄생은 없었을 것이고, 그 이후 1918년 국내 경성의학전문학교 청강을 통한 최초의 국내 여의사들 탄생 역시 마찬가지이며 이어 1928년부터 경성여자의학강습소 설립, 1938년 5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개교로 연결되는 여자의학교육체계가 자리잡는다. 이화여대 의과대학도 그렇게 탄생했다.

로제타 홀은 1933년 선교사로 정년을 맞아 68세에 미국의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조선의 문화를 아름답게 전파했다. 1951년 4월 5일 86세로 영면했다. 한국을 사랑했던 그녀와 로제타 일가는 한국에 잠들기를 유언했다. 양화진 제1묘역에는 로제타 셔우드 홀과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 아들인 셔우드 홀과 1991년 9월 19일 타계한 셔우드 홀의 아내 매리언 버텀리, 셔우드 홀의 쌍둥이로 태어난 날 죽은 형제 프랭크, 셔우드 홀의 여동생 이디스 마거릿 홀 등 홀 가족 6명이 잠들어 있다. 그녀의 기록인 ‘로제타 홀 일기’는 우리 근대화 시기의 여성과 의료 역사의 기록이기도 하다.

활인(活人)! 지혜의 여성들

우리나라 개화기 근대화 시기에 김점동(박에스더)을 시작으로 생명을 구하려는 활인(活人)의 철학을 바탕으로 의업에 종사하겠다고 나섰던 선각자 여성, 여의사 선배들께 그 후예의 한사람으로 놀라운 감동으로 깊이 감사한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마음은 처음엔 병들고 어려운 처지의 여성을 구하기 위해 시작하였으나 종국에는 국민 전체를 위한 인술이었다. 생명의 존엄성을 넘어 국민건강과 질병의 예방과 치료는 물론, 사회와 국가에 대한 깨우침으로 나아가서는 3.1운동과 여성운동, 독립운동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녀들은 또한 대한민국 성평등 국가를 이루는데 행동으로 능력을 발휘했으며, 유리보다 더 견고한 돌천장, 철천장을 부수는데 21세기인 지금도 온몸과 대단한 실력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역사의 현장에서 가끔 현실에 맞서 일부 장벽을 부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우리의 현장은 슬프도록 힘들다.

필자도 어렸을 때 열심히 노력하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며 능대능소(能大能小)한 실력을 기르는 것이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말씀하신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랑과 정성으로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고 실력을 기르면, 하고 싶은 일을 잘할 수 있고 제대로 인정받는 줄 믿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절망과 좌절이 곳곳에 존재하는지, 나의 지나온 인생이 바로 증거다. 젊었을 때 읽었던 이규태 선생님의 책 제목인 ’됴선의 불쌍한 녀편네‘ 들이 아직도 도처에 존재한다. 전문직이라고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필자 최대의 자산인 낙천성과 긍정적 삶의 태도로 오뚜기 같이 아름다운 꿈을 매일, 매순간 다시 꾼다. 현실에서는 많은 순간이 실망이고 좌절이지만 실력이 힘일 것이라는 무지개 꿈과 믿음이 있다. 내가 이루지 못하면 나의 후예들이 이룰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 김점동의 후예로 내가 조금 몇 걸음을 온 힘을 다해 내딛은 것과 같이 우리 후배, 후예, 딸들은 더 빨리 더 앞서 달리기도 할 것이다. 김점동, 이소사, 김소사의 후예들이 곳곳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는 이 좌절의 사회, 절망적 사회 대한민국을 지혜로운 여성적 가치로 다시금 구할 것이다. 슬기로운 한국 여성들이 이 사회를 구할 것이라고 계속 내 마음과 머리를 세뇌한다.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무엇보다 1898년 여권통문을 통한 여성권리선언을 하고 여성교육에 임금이 나서기를 상소로 호소하고 자발적 기부로 여학교를 세우며 행동으로 나섰던 북촌 양반집 여성들 이소사 김소사들의 여성권리선언과 교육에 대한 열정, 용감함에 감동한다. 김점동(박에스더)을 비롯한 선각자 선배 여성들이 앞서며 우리가 깨우쳐졌고 그녀들의 철학과 가치에 근거한 행동으로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더욱더 명백하다.

2020년 우리 지혜의 여성들이여, 분연히 용기내어 과거의 언제나처럼 우리가 일어나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자. 생명을 구하는 활인의 정신으로 나와 사랑하는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다시금 개혁하자! 사랑하는 우리 미래세대에 영원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신비의 여성성과 모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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