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신문이 창간되던 1988년, 성폭력 가해자의 혀를 절단했던 주부가 ‘과잉방어’로 기소되어 구속됐다가 여성들의 투쟁 끝에 ‘정당방위’로 풀려난 사건이 있었다. ‘안동 주부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최근 이 사건을 연상시키는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만취한 20대 여성을 차에 태워 산길로 끌고 가 강간하려던 남성이 피해 여성에게 혀를 잘렸다. 경찰은 남성은 기소하고 여성은 ‘과잉방어’이긴 하지만 정상참작해 기소하지 않았다.

성폭력 피해 여성이 억울한 가해자에서 온전한 피해자로 되기까지 여성운동의 시간 32년이 흘렀다.

‘낙태죄’ 완전 폐지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정족수 10만명을 채웠다는 소식은 반가웠다. 작년 헌법불일치 받았던 형법의 낙태 금지 조항이 드디어 개정 작업에 들어갔지만 정부 개정안에서 ‘낙태는 여전히 죄’라는 틀을 유지하고 있다. 수십 년간 여성들이 외쳐온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라는 외침이 이번에는 받아들여져야 한다.

지난 32년은 여성신문사가 최초의 여성정론지를 발행하는 주식회사로 설립되어 ‘버텨온’ 시간이다. 30여년을 ‘성평등 실현’이라는 창간이념을 유지하며 세계 유일의 여성정론지로 살아남는 데 성공했기에 ‘버텼다’는 표현을 썼다. 여성신문의 역사를 ‘기적의 허스토리’라고 말한다.

당시 ‘지면을 통한 여성운동’에서 지금은 ‘미디어를 통한 여성운동’이라고 말한다. 온·오프 다양한 채널을 가진 플랫폼 미디어가 되었다.

올해는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더욱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모든 어려움에는 교훈과 새로운 길이 들어 있다고 믿는다. 코로나로 막혔던 20회 여성마라톤 대회는 ‘랜선마라톤’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냈고, 긴축과 디지털 전략으로 불황의 엄습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으며 막막함은 희망을 구체화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었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수많은 여성운동과 여성의 삶이, 양성평등을 향한 사회변화가 여성신문의 틀안에 담겼다. 기록자이기도 했지만 여성신문은 그 자체가 여성운동의 주체이기도 했다. 소규모 국민주 모금으로 시작한 주식회사 여성신문사의 경영은 늘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위태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선의와 헌신과 의지가 모여서 여성신문의 32년이 지켜질 수 있었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한 발자국씩 내딛으며 걸어온 사명의 여정에 함께 한 여성신문의 동지들께 깊은 감사와 존경을 올린다.

여성신문은 여성운동과 언론과 경영이 교차하는 독특한 지점에서 위치하고 있다. 여성의 관점, 저널리즘의 전문성과 경영의 기술을 익히며 새로운 여성의 역사를 써나가는 중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변화하는 매체 환경, 팬데믹을 몰고 오는 자연의 역습과 불황, 백래시와 혐오 속에서 여성신문은 또 새로운 한해를 준비한다. 따가운 비판에 더 겸허하게 귀 기울이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부지런히 움직이며, 더 많은 손과 연대하며 새 길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이제 여성신문의 한 세대가 지났다. 시대의 변화도 실감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한걸음씩 여성을 위한 길을 가는 여성신문의 행진은 계속 될 것이다. 이 사명을 이어 맡을 여성신문 2세대의 등장을 기다린다. 앞으로 여성신문은 디지털 세대의 리더십이 이끄는 새로운 여성미디어로 성장해 갈 것이다.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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