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은 1995년 UN에서 주최한 제4차 세계여성대회의 선언문에 처음 등장했다. 19조에 “여성의 역량 강화와 선진화를 촉진케 할, 모든 수준에서의 계발 정책 및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상호 강화적인 젠더 감수성 정책 및 프로그램을 설계, 구축하고 관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 개념에 대한 명확하게 합의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통상 “일상생활 속에서 젠더에 대한 차별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 “성별의 불균형에 따른 유·불리함을 잡아내는 것” 등으로 해석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어떤 사건에 대해 심리할 때 “여성이 사회적 약자로서 가지는 불리함을 보완해야 한다”는 취지로 “성폭행, 성희롱 등 젠더 관련 사건에서의 여성 측의 진술 및 증언, 증거 효력의 인정 기준을 완화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서울·부산시장 후보 공천 위해
당헌 개정하는 더불어민주당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이 의심되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은 권리당원 투표의 압도적 찬성(86.6%)으로 내년 4월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에 후보를 내기로 했다. 민주당 당헌(제96조2항)에 따르면 ‘당 소속 선출직 공직자의 중대한 잘못으로 재·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된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추천하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런 규정에 따르면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오거돈 전 부산시장 모두 성추문으로 인해 자리를 비우게 됐기 때문에 민주당은 서울·부산시장 선거에 후보를 낼 수 없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지난 달 29일 의원총회에서 “후보자를 내지 않는 것만이 책임 있는 선택은 아니며, 오히려 후보공천을 통해 시민의 심판을 받는 게 책임 있는 공당의 도리라는 판단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피해 여성께 마음을 다해 사과를 드린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서울·부산시장 재보선은 여당 출신 시장의 잇따른 권력형 성폭행으로 치러지는 ‘성추행 보궐선거’”라며 “사건을 적당히 뭉개려는 청와대와 여권의 미필적 고의가 작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그 자체로 2차 가해라는 인식이 있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입장을 밝혀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정치권의 반응보다도 우리가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박원순 성추행’ 피해 여성이 이낙연 민주당 대표에게 보낸 질문이다. 그는 “‘피해 여성’에 제가 포함되는 것이 맞습니까?”, “도대체 무엇에 대하여 사과하신다는 뜻입니까?”, “사건의 공론화 이후 지금까지 집권 여당, 해당 정치인의 소속 정당으로서 어떤 조치들을 취하셨습니까?”, “앞으로 저는 이 사과를 통해 어떤 변화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우리 사회는 공당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앞으로 사건의 진상 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실 계획입니까?”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입만 열면 ‘피해자 중심주의’를 외쳤던 민주당이 성실하게 답변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식인 연대 같은 외부 충격 통해
정치권 성인지 감수성 높여야

미국 정치에 ‘혁신 시대’(Progressive Era)가 있었다. 미국 역사상 사회 운동 및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들끓었던 1890년대에서 1920년대를 말한다. 당시 혁신 시대를 이끈 사람들은 정치인이 아니라 지식인 그룹이었다. 혁신주의자들은 도시의 정치 보스들의 권력남용과 악덕 기업가들에 맞서서 투쟁했다. 그들의 목표는 민주주의의 신장과 정직하고 효율적인 정부, 그리고 대기업과 특수 이권집단에 대한 더욱 효과적인 통제 및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정의의 구현이었다. 구체적으로 경제 분야에서는 독과점법 채택, 정치 분야에서는 오픈 프라이머리 실시, 사회 분야에서는 노동자 권리 및 여성 참정권 확대 등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는 20세기 초 미국 혁신 시대에서와 같이 지식인 연대와 같은 외부적 충격을 통해 성 인지 감수성을 높이기 위한 대장정에 나서야 한다. 창조적 파괴의 중심에는 여성신문과 여성 시민단체, 그리고 젠더 감수성이 높은 남․여 지식인들이 있어야 한다. 단언컨대, 성평등 사회를 위한 도전은 계속되어야 한다.

©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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