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가해자와 그 변호인의 전략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 분석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물론 옥중에서 매매혼을 이용해 거짓 혼인신고를 했던 손정우처럼 역사에 남을 정도로 참신한 사례도 있기는 하다. 그는 2심이 진행되는 도중 혼인신고서를 제출해 “부양할 가족이 생겼다”는 이유로 감형 받았다. 수많은 여성들에게 가했던 폭력에 대한 처벌을 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 한번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고, 동시에 사법부를 상대로 위증까지 했던 사건이다. 이런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상공개를 통한 여론재판에는 사법기관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다. ⓒ여성신문
성폭력 가해자들과 그 변호인들은 감형을 받기 위해 비윤리적 전략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으며,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사회에 기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 장래가 밝은 청년이므로” 가해자는 감형을 받는다. ⓒ여성신문

 

위증하고 반성문 내는 가해자들
초범이고 미래가 창창해 ‘감형’

하지만 성폭력 가해자들의 첫 번째 전략은 기본적으로 위증이다. 범죄 사실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이야기를 짜 맞추면서도, 진실은 삭제하고 동시에 없었던 일을 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거나, 서로 합의했다고 믿었다는 식의 독심술도 펼친다. 가해자들이 성범죄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은 남성 판타지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마 그 소설의 원천이 여성 혐오에 기반한 강간 문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와 한 번쯤 자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저 여자가 내게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치료받아야 하고, 행동은 처벌받아야 한다.

가해자의 변호인도 사건의 본질을 흐림으로써 가해자를 보위하고 피해자를 공격하는 전술을 쓴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할 필요는 없다. 반성문은 재판부에 내는 것이다. 일단 합의만 하면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으니 압박과 회유가 필요하다. 결국 피해자가 중도포기하고 합의하도록 최선을 다하라. 만약 피해자가 합의하지 않으면 여성 단체에 기부금을 보내라. 또한 적정 수준까지 잘못을 인정하면 효율적으로 형량을 줄일 수 있다.” 이 같은 비윤리적 전략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으며, 피해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사회에 기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 장래가 밝은 청년이므로” 감형 사유가 된다. 성범죄 변호사들이 대놓고 광고하는 전략이 선고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미국 미투 운동에 불씨를 당긴 2015년 스탠퍼드대 성폭력 사건의 피해 생존자자, 샤넬 밀러의 『디어 마이 네임』.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법 시스템의 문제와 성폭력 피해자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동녘
미국 미투 운동에 불씨를 당긴 2015년 스탠퍼드대 성폭력 사건의 피해 생존자자, 샤넬 밀러의 『디어 마이 네임』.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법 시스템의 문제와 성폭력 피해자의 삶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동녘

 

“당시 무슨 옷 입었나” 묻는 재판부
모욕적 질문 견뎌내야 하는 피해자

법정에서 발생하는 피해자에 대한 폭력과 2차 가해도 여전하다. 지난 5월 열렸던 한 성범죄 공판에서는 재판부가 피고인 퇴정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피해자는 증언할 때마다 가해자의 반응을 그대로 느끼며 공포에 떨었다. 또한 변호인들은 사건의 구성 요소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질문과 주장으로 피해자를 압박한다. 미국에서 전국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샤넬 밀러(Chanel Miller)의 ‘피해자 진술서’는 변호인들의 흔한 전술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몸무게가 몇인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나? 평소에 술을 얼마나 마시나? 파티광이라면서? 남자친구와 진지한 관계인가?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하나? 바람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 있나? 사건 당일 어디서 소변을 보았는가?” 이처럼 피해자들은 평소의 행실이나 옷차림 등 피해 사실과 무관한, 나아가 비열하고 모욕적인 질문을 수사 및 재판 과정 내내 참고 견뎌야 한다.

(피해자 진술서가 익명으로 공개된 이후, 강간범에게 고작 6개월의 형을 선고했던 담당 판사는 파면되었다. 몇 년 뒤 샤넬 밀러는 실명으로 수기를 출판했는데, 한국에서는 『디어 마이 네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으니 일독을 권한다.)  

스탠퍼드대 성폭력 사건 가해자 브록 터너. ⓒStanford Department of Public Safety
스탠퍼드대 성폭력 사건 가해자 브록 터너. ⓒStanford Department of Public Safety

 

나약하고 측은해 보여야 하는 피해자
진술은 논리 정연해야 한다는 수사기관

반면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신고를 한 그 순간부터 ‘피해자다움’을 강요받는다. 묻는 말에 고분고분하게 답해야 하고, 확신에 찬 태도가 아닌 나약하고 측은한 몸가짐으로 일관해야 한다. 충격과 상처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야하면서도, 동시에 진술의 논리적 일관성과 명확성을 확보해야 한다. 수사관들은 피해자가 강간을 당한 직후에 민첩하게 경찰 신고 혹은 형사 고소를 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저 다음 날 출근을 했다면 어떻게 그렇게 큰 사건을 겪고도 직장에 나갔냐며 그 의도를 의심받는다. 성폭력 트라우마는 부분적 기억 상실을 야기할 수 있다고 의학적으로 입증되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으면 피해자에게 불리한 정상이 된다. (한편 가해자들은 손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은 “술에 취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변명해왔고, 이는 오랫동안 심신미약에 따른 감형 사유로 받아들여졌다.)

피해자의 신원이 알려져 있는 경우, ‘피해자다움’은 사법부의 테두리를 넘어 사회 전반에서 요구된다. 김지은씨는 단지 업무에 충실했다는 이유로 성폭력 경험을 부정당했다. 그가 저술한 『김지은입니다』에도 잘 묘사되어 있듯이, 피해자들은 평소처럼 외출하거나, 밝은 색상의 화려한 옷을 입거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이거나, 길거리 음식을 사먹으며 일상을 즐길 수 없다. 세상의 시선에 따르면 “피해자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종 판결이 내려지는 그 날까지, 피해자들은 항상 실의에 빠져 있어야하고, 불행해야 하고, 업무 수행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처 입은 존재로 살아가야 할까?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피해자 정체성’ 단 하나뿐인가?

성폭력의 중대성은 한 사람이 동등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점, 즉 성을 매개로 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다루어졌다는 점에 있다. 단순히 성행위를 했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현행법이 물고 늘어지는 성적 수치심은 성폭력이 피해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의 백분의 일도 설명하지 못한다. 성범죄는 한 사람의 본질을 구성하는 성 그 자체가 폭력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개인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데에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그 여파가 피해자의 삶과 자아 개념 전반에 걸쳐 나타날 수 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피해자가 때때로 자기 가치를 부정하고 자책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성적폐카르텔개혁을위한공동행동이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동문 앞에서 피해자 보호에 미온적인 사법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성인지 감수성 없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법복을 여성들이 직접 벗기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여성신문
지난해 11월 29일 성적폐카르텔개혁을위한공동행동 활동가들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피해자 보호에 미온적인 사법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성인지 감수성 없는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법복을 벗기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여성신문

 

피해자는 충분히 전략적·전술적일 수 있다
‘피해자다움’ 강요는 피해자 삶 부정하는 것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은 이미 인간성을 부정당한 피해자의 삶을 또 다시 부정하는 행위다. 한 인간의 생존 능력과 회복탄력성을 인정하지 않고 지속적인 고통과 순응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약하고 측은하고 고통에 빠져있는 피해자”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한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생존자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면, 성폭력 피해자는 그 누구보다도 힘을 내어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성폭력 피해자는 충분히 전략적이고 전술적일 수 있다. 성폭력 피해자는 법정에서 부당한 질문에 항의할 권리가 있으며 가해자 측 변호인과 논쟁할 권리가 있다. 다각도로 비윤리적인 작전을 짜는 가해자에 맞서, 피해자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치밀하게 전략과 전술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사법부의 정의로운 판단을 돕기 위해 증거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이며 자원을 활용하고 조력자를 모을 수 있다.

특히 성범죄에 관대한, 그리고 피해자 지원 시스템이 여전히 미비한 한국 사회에서, 가해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려면 피해자들은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반면 가해자와 그 변호인의 전략과 전술은 지속적으로 폭로되어야 한다. 최근 생존자 수기들이 꾸준히 출간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모든 피해자가 생존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싸움을 시작한 이의 의지와 적극성을 “피해자답지 못하다”며 비난해서는 안 된다. 단지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을 넘어, 전략적 피해자, 전술적 피해자의 다양한 모델을 상상하고 수용하는 한국 사회가 되기를, 그리고 용기를 낸 피해자들과 함께 싸우는 정의로운 이들이 많아지는 한국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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