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사진작가·성평등 교육활동가 혜영
첫 개인전 ‘몸들의 말하기’ 열어
21일까지 서울 은평문화예술회관
‘낙태죄 폐지’, 성폭력 생존자 연대, 여성 1인가구
주목받지 못한 여성의 이야기 렌즈에 담아
희귀병 투병 후 ‘아픈 몸으로 잘살기’에 관심
“여성주의 현장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 하고파”

혜영 사진작가 ⓒ홍수형 기자
혜영 사진작가는 세상이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렌즈에 담아왔다. 첫 개인전 ‘몸들의 말하기’를 연 그를 지난 12일 서울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만났다. ⓒ홍수형 기자

흑백사진 속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에서 여성의 살갗에 쓴 글귀로 시선을 옮겼다. “MY BODY MY CHOICE (나의 몸 나의 선택)”, “나의 몸 나의 삶은 범죄가 아니다”.

혜영(41) 작가는 2017년 한국여성민우회와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배틀그라운드(Battleground) 269’를 하며 수많은 여성의 얼굴을 마주했다. “모두가 카메라 앞에 서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했어요. 다른 자리에서 만나면 못 알아볼 정도였죠. ‘낙태죄 폐지’ 메시지가 여성들의 몸으로 강력하게 작동했고, 남다른 힘을 지닌 사진이 나왔어요. 관람객들에게도 그 힘이 전해질 거라고 확신해요.”

그의 첫 개인전 ‘몸들의 말하기’가 오는 21일까지 서울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렌즈에 담아왔다.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여성, 성폭력 생존자와 연대하는 여성, 화려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지만 나름 잘 살아가는 1인가구 여성 등 “남성 중심 사회에서 가려진 몸들의 이야기”다. 강렬하고 결연한 메시지를 담았지만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는 사진들은 아니다. 렌즈 너머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느껴져 한동안 들여다보게 한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혜영,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배틀그라운드(Battleground) 269’ ⓒ혜영 작가 제공
혜영, ‘낙태죄 폐지를 위한 사진 프로젝트 배틀그라운드(Battleground) 269’ ⓒ혜영 작가 제공
ⓒ(재)은평문화재단
ⓒ(재)은평문화재단

“친한 친구가 이번 전시를 보고 ‘너 진 빠지겠다’ 하더라고요. 강한 메시지를 담은 작업이라 힘들겠다고, 그냥 새 사진, 풍경 사진 찍으래요(웃음). 근데 힘들지 않았어요. 알수록 어렵고 괴롭기도 하지만 사진이 싫었던 적은 없어요. 늘 여성주의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요. 제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 고려해보고 싶어요.”

혜영 작가의 은평 뉴타운 도시개발 기록 작업 ⓒ혜영 작가 제공
혜영 작가의 은평 뉴타운 도시개발 기록 작업 ⓒ혜영 작가 제공

그는 올해로 17년째 사진 작업을 해왔다. 원래는 기록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나고 자란 은평구 일대가 뉴타운 도시개발로 변해가는 모습, 어릴 적 추억의 공간이 파괴되고 해체되는 모습도 꾸준히 사진으로 남겼다. 페미니스트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부터였다. 2012년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 허리’에 참여했고,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러 여성단체와도 함께했다.

성차별은 공기처럼 그의 일상과 사진계에 퍼져 있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이것저것 배우다가 사진에 빠졌다. 제대로 공부하려고 25살에 대학 사진영상학과에 들어갔다. 어린 동기들을 이끌며 ‘으쌰으쌰’하는 성격이었고 성적도 괜찮아서 교수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보이지 않는 벽의 존재를 깨달은 건 졸업할 즈음이었다.

“교수님들이 남자애들만 데려가서 좋은 스튜디오에 ‘꽂아’주시더라고요. 억울했거나 화났다기보다는 내가 뭘 잘못했나?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싶었어요. 그때도 여성들은 다양한 작업을 하기보다 주로 결혼, 아기사진 스튜디오로 갔죠. 남성 중심적 군대 문화, 도제식 분위기, 이게 사진 세계구나. 차별을 느꼈어요.”

사진 작업은 돈이 되지 않아서 생활을 꾸리려고 여러 노동을 했다. “여성 비정규직의 참혹한 현실”을 체감한 시간이었다. 미술관에서 1년간 일하며 감시, 검열, 모욕, 성추행 등을 겪었다. 퇴사하고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달래려다 ‘사진 치료’의 세계를 만났다. “사진을 활용하면 제도권 교육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소수자들을 도울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2016년 교육단체 ‘나를 만나는 사진수업’을 설립했고, 올해는 다른 활동가와 함께 몸 다양성 교육단체 ‘프리즘’도 만들었다. 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전문강사 과정도 수료했다.

이제 혜영 작가는 자신을 ‘사진작가’이자 ‘성평등 교육활동가’라고 소개한다. 요즘 전국을 돌며 사진을 매개로 한 성평등 교육을 하고 있다. 3년째 전남여성가족재단과 함께 여성 창업자들에게 사진을 활용한 제품 홍보 방법을 가르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강의도 하고 있다.

수업에서 만난 1020 세대에게서 그는 “강렬한 신자유주의 성향”을 본다.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흐름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성평등, 인권을 이야기하면 ‘역차별’이라며 거부반응을 보이는 10대 남성들도 많아요. 그럴 땐 꼭 오해를 바로잡아주고, 성평등은 누구를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같이 잘살기 위한 거라고 말해줘요.”

혜영, 성폭력 피해에 공감하는 ‘첫사람’ 사진 프로젝트 ⓒ혜영 작가 제공
혜영, 성폭력 피해에 공감하는 ‘첫사람’ 사진 프로젝트 ⓒ혜영 작가 제공
혜영, 여성 1인 가구 주거문화 사진기록 프로젝트 ‘1들의 증명’ ⓒ혜영 작가 제공
혜영, 여성 1인 가구 주거문화 사진기록 프로젝트 ‘1들의 증명’ ⓒ혜영 작가 제공

아픈 몸을 비극 혹은 비정상으로 여기는 사회에 대해서도 그는 할 이야기가 많다. 2018년 작품 ‘자화상’은 ‘건강이 스펙’인 사회에서 ‘아픈 나’를 긍정하려 분투했던 기록이다. 뼈에 악성 종양이 생기는 방골성 골육종이라는 희귀병을 뒤늦게 발견하고 수술, 항암치료, 회복까지 약 반년간의 과정을 사진으로 남겼다.

속옷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선 자신의 사진을 가리키며 그는 말했다. “다리엔 흉터가 생겼고 통증도 사라지지 않았어요. 다리를 꺾거나 뛰기도 힘들어요. 장애를 분명하게 느끼는 삶이죠. 이렇게 아픈 몸은 불편하고 무능한 존재로 취급받잖아요. 근데 정말 그런가? 이 사진(자화상)을 찍으며 스스로 질문했어요. 저는 가장 아팠을 때도 주변의 소중한 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삶의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어요. 이 사진에선 그런 힘이 느껴져요. 제게 큰 힘이 돼 줬고, 지금도 집에 붙여두고 보는 사진이에요.”

“잘 아플 권리”도 강조했다. “잘 아프려면 내 주변에 다른 아픈 몸들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아프다고 삶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고, 건강하던 사람도 아플 수 있고, 아픈 몸으로 살려면 주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해요. 제게는 동네 페미니스트들의 돌봄과 지지가 많은 힘이 됐어요. 큰 병을 겪고 나니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졌고, 뭔가 할 수 있을 때 즐겁게 하되 스스로를 존중하려 해요. 앞으로 교육 활동을 꾸준히 잘하고 싶고 언젠가 제 스튜디오도 운영하고 싶어요. 더 많은 이들과 관계 맺고 도우면서 나이 들고 싶어요.”

혜영 작가는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저뿐만 아니라 모델로 참여한 여성들이 함께 보내는 메시지를 담은 전시다. 이렇게 많은 여성이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했다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혜영 사진작가 ⓒ홍수형 기자
지난 12일 혜영 작가가 서울 은평문화예술회관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이번 전시는 은평문화재단이 마련한 지역작가초대전의 하나다. 은평구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창작, 예술 활동을 해오고 있는 시각예술가를 발굴, 초청해 전시를 지원하고, 지역주민들에게는 다양한 시각예술 감상·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예술가는 소정의 초청료와 함께 전시실 공간·홍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올해는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온라인 영상 투어 등 비대면 전시도 함께 제공한다.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리며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관한다. 관람료는 없고,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네이버예약(https://booking.naver.com/booking/6/bizes/429671/items/3642762?preview=1) 또는 유선 예약 후 관람할 수 있다. 문의 은평문화재단 공연예술팀 02-351-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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