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페미니즘 읽기] ‘젠더’는 두 다리 사이에만 있다? 발걸음마다 존재한다!
[에코페미니즘 읽기] ‘젠더’는 두 다리 사이에만 있다? 발걸음마다 존재한다!
  • 박기남 한국여성연구소 이사
  • 승인 2020.12.02 11:47
  • 수정 2020-12-02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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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페미니즘 읽기] 『젠더』 이반 일리치 지음

 

『젠더』 이반 일리치 지음, 사계절 출판사
『젠더』 이반 일리치 지음(사월의책 출판사)

 

에코페니즘 읽기 제5강은 이반 일리치의 『젠더』 로, 인하대학교 영문학과 박혜영 교수가 해설을 했다. 처음으로 읽게 된 이반 일리치의 책은 단숨에 읽힐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18세기 영국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 연구로 학위를 받은 박교수의 열정적인 강의 덕분에, 나와 같은 무지한 수강생도 일리치가 말하는 ‘젠더’의 역사적 배경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젠더』는 ‘젠더’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단일한 섹스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에서 찾으려는 것은 망상임을 일깨워주고, 성차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 영역을 축소하고 공유지의 회복과 자급에 기반한 삶의 영역을 확장하라고 제안한다는 점에서 에코페미니즘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서 거리두기를 멈추었던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비판을 자본주의 언어와 지식이 아닌 비자본주의 사회의 언어와 지식으로 ‘젠더’를 새롭게 해석하고 상상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고 있다.

그림자 노동이 필요한 현대의 주부
자급자족 하는 비산업사회의 여성

『젠더』는 모두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크게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 경제성장 방식으로는 남녀평등을 이룰 수 없음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1장, 2장, 7장을 할애하고 있다. 1장의 제목 ‘성차별로 이룬 경제성장’은 매우 신선했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자본주의 경제가 바로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에 기반해 있음을 명쾌하게 표현했다. 그동안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차별받고 있음을 통계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는데, 한 방에 날려줘서 참 통쾌했다. 이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익숙해져서 이 체제 안에서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우리를 비웃는 것 같았다.

일리치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여성들은 삼중의 차별을 받는다. 통계로 보고되는 경제에서의 차별과 보고되지 않은 비공식 부문(뇌물경제, 지하경제)에서의 차별, 그리고 앞의 두 공식경제의 지하부문인 그림자 노동에서의 차별이다. 이 마지막 그림자 노동의 대표적인 것이 무보수 가사노동이다. 이 무보수 가사노동은 산업사회 들어와서 새로 생긴 것으로서 비산업사회의 젠더노동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은 물품 및 서비스 생산과 달리 상품소비자가 수행하는 노동이며, 특히 가정에서의 소비활동이다.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여 사용가능한 물건으로 전환하는 데 기울이는 노동은 모두 그림자 노동이다.

일리치는 달걀을 부치는데 현대의 주부와 비산업사회, 즉 자급사회의 할머니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예로 든다. 현대 주부가 달걀 프라이 하나 부치는 데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엄청난 그림자 노동이 자리 잡고 있다. 마트에 가서 달걀을 고르고 자동차에 싣고 아파트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가 가스레인지를 켜고 냉장고에 있는 버터를 꺼내 달걀을 부친다. 각 단계마다 주부는 상품에 가치를 추가한다. 반면 비산업사회에서 여성들은 현대 주부처럼 그림자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할머니는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 돼지기름으로 손자가 공유지에서 주워온 장작으로 불을 지펴 달걀을 부친다. 할머니는 여성 젠더 고유의 일을 함으로써 자급자족을 유지한다. 반면 현대의 주부는 그림자 노동이라는 외롭고, 힘겹고, 인간미 없고 시간을 죽이는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

현대 사회가 고도로 상품집약적이 되다 보니, 소비에 필요한 시간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무보수가사노동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차별 없는 경제를 꿈꾸느니, 경제 축소 정책을 추진하는 게 훨씬 현명하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남녀평등을 이루겠다는 것은 허황된 목표라고 일침을 가한다.

두 번째 부분은 3장부터 6장까지로 자본주의 사회의 성적인 계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과정을 서술하면서 어떻게 젠더와 성이 단절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토박이문화 속 젠더, 그리고 젠더의 공간과 시간, 역사 서술을 통해 젠더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우며, 두 개의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를 미화하고 식민주의의 광란의 여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성의 계보학에 기초한 사회과학 이론들은 모든 상호작용을 교환관계로 환원함으로써 상보성이라는 바탕을 부정하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경제적으로 분석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비판한다.

일리치에게 “젠더는 두 다리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행동거지마다 존재하는 것이다”. 장소성, 역사성을 갖는 문화마다 다른 규칙을 갖고 있는 젠더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화폐경제가 생기기 이전의 체계이다. 젠더는 비대칭적이고 상보성을 갖고 있어서 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젠더 영역과 권한을 인정하고 같은 젠더 안의 개인은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산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성’으로 단순화하고 획일화된 젠더 없는 존재, 얼마든지 성형가능한 개인이라고 슬퍼한다. 1950년대 인류학자들이 제3세계 연구를 하면서 젠더에 바탕을 둔 행위야말로 발전의 장애물이자 전형적인 성역할에 매인 활동이며, 낮은 생산성과 빈곤의 본질적인 원인이라고 보고하였다. 이후 젠더는 성역할의 원시적 형태로 보는 기본 가정이 강화되면서 여성학 연구에서 슬그머니 ‘젠더’를 눈가림해왔다고 비판한다.

경제성장 통한 파이 늘리기 넘어
환경파괴 줄이고 독점에 도전해야

그렇다고 일리치의 주장이 우리가 그토록 해체하고자 했던 젠더체제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닐 것이며 돌아갈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일리치에 의하면,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의학논문이나 공공 법규에서 출산은 여성의 영역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생리가 멈추고 몸이 불어나는 등의 임신 징후, 유산 또는 낙태, 출산 및 수유는 영아살해-영아(in-fant)라는 말 자체가 라틴어로 말을 못한다는 뜻이기에-를 택할지 양육을 택할지의 문제 못지않게 여성에게 달린 일이었다. 이런 문제는 사적인 일도 비밀도 아닌, 그저 젠더에 맡겨진 일이었다. 젠더체제가 작동했던 시대는 공동체의 자율적인 영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 공권력이 여성의 몸에 개입해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는 현재의 한국 사회가 더 진보한 세상이라고 평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산업사회의 낭만화, 젠더체제의 복귀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차별을 극복하는 데 젠더체제가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숙고해야 할 것이다.

결론에서 일리치는 성차별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통해 파이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환경파괴를 줄이는 운동과 상품과 서비스의 근본적 독점에 도전하는 운동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운동들의 공통조건은 경제 영역의 축소, 즉 공유(the commons)를 회복하는 것이다. 경제적 중성이라는 이중의 게토–즉 젠더의 보호막이 사라진 상황에서 성차별의 피해까지 보고 있는 상태-에 갇혀 있음을 냉정한 시선으로 받아들이고 경제적 성이 제공하는 안락함을 거부하라고 부추긴다. 우리에게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자본주의 ‘밖’에서 에코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발견하라고 꼬드기고 있다. 에코페미니즘 읽기를 통한 자유로운 토론과 풍부한 상상 그리고 소박한 실천의 조각들이 젠더 평등과 생태 정의의 길을 한발 한발 앞당길 것이다. 

박기남 한국여성연구소 이사. 전 강원도여성가족연구원장, 전 한국여성재단 사무총장.
박기남 한국여성연구소 이사. 전 강원도여성가족연구원장, 전 한국여성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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