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페미니즘 읽기](끝)

그레타 가드, 패트리스 존스(왼쪽부터). 사진=위키피디아
그레타 가드, 패트리스 존스(왼쪽부터). 사진=위키피디아

 

에코페미니즘 읽기의 마지막 6강은 황주영 지구지역행동네크워크 활동가가 ‘퀴어 에코페미니즘과 욕망의 윤리’라는 주제로 진행했다. 그는 그레타 가드의 ‘퀴어 에코페미니즘을 향하여’ 논문과 패트리스 존스의 ‘에로스와 생태 방어의 메카니즘’ 글의 논의를 통해 에코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사이의 연결과 교차점들을 검토했다. 그는 민주적이고 생태적인 사회는 성적 다양성과 성애적인 것(the erotic)을 가치 있게 여긴다고 주장했다.

발 풀럼우드는 가부장적 서구사회는 세상을 육체/정신, 생성소멸/고정불변, 무질서/질서, 비본질/본질, 가상/진리, 자연/문화, 필연/자유, 여성/남성, 자연/인간, 동물/인간, 비백인/백인으로 나누는 이원론이라고 봤다. 이것은 상호연결처럼 보이지만, 위계적 구조다. 게다가 우월한 집단이 의존하고 있는 열등한 집단을 배경화, 배제, 병합/관계적 정의, 도구주의/대상화, 동질화/정형화 등의 논리적 장치로 지배를 지속하고 있다.

N개의 자연에는
N개의 섹슈얼리티가 존재한다

그레타 가드는 이원론 목록의 연장선상에 퀴어/이성애, 성애적/이성의 쌍도 연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성적 본능의 목표를 번식으로 제한하고, 자연은 이성애적이며, 생물학적 성은 고정되어 있고, 성적쾌락은 번식을 유도하는 부수적인 것으로 한정했다. 즉, 재생산이 없는 성적 관계와 신체를 배제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한 부족에서는 여성 간 결혼이 이루어지며, 세계 여러 지역에는 다양한 방식의 성행위와 동성애 문화가 이미 존재한다. 동물 세계에서는 이성애 외에 여러 가지 방식의 생식과 성애의 형태가 있으며, 심지어 성적 활동이 재생산과 무관한 종도 있어서 N개의 자연에 N개의 섹슈얼리티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서구 기독교는 식민지와 문명화 과정에서 이성애주의 패러다임으로 이와 같은 복잡다단한 생식과 성애를 비정상, 죄악 그리고 반문명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은폐시켜 동성애 혐오를 양산했다. 또한 생식이 목적이 아닌 모든 성행위에 공포와 혐오를 느끼게 하는 성애공포증을 확산시켰다. 여성과 자연과 성애에 대한 비하는 상호강화 됐다.

이원론의 양측 면에서 ‘수직적’상에 있는 집단들은 연합이 된다. 즉, 이성, 이성애, 백인성 사이에 연합이 이뤄지고, 반대항에 있는 여성, 비백인, 동물, 몸, 자연, 성애적인 것 사이의 연합이 이뤄진다. 이들에 대한 열등성과 종속은 법에 의해 선언되고 종교에 의해 가차 없이 강화됐다. 자연을 비하하고, 같은 집단에 속한 것을 ‘자연에 가까워서’ 비하하고, 퀴어는 자연에 반한다고 비하하는 이중 모순을 보인다. 섹슈얼리티를 평가절하 하는 문화에서 퀴어는 여성화, 동물화, 자연화로 연결이 되고, 유색인은 자연화, 여성화, 동물화, 성애화로 연결되며, 자연은 여성화, 퀴어화, 성애화 개념으로 연결된다.

자본주의 경제는 가부장제적 유목주의에 기원하며, 식민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인종차별주의, 이성애주의, 성차별을 통치에 이용해왔다. 결국 동성애 혐오를 구조화했고 욕망을 억압했으며, 금욕을 강요하고 에로스를 파멸시켰다. 게다가 호모포비아와 성애공포증은 다양한 동물의 세계와 호모사피엔스에서 발견되는 동성애를 비롯한 퀴어한 섹슈얼리티의 복수성과 젠더표현의 다양성을 외면하고 은폐시켰다.

“에로스, 신체적·감정적·지적 공유
공유자 사이 다리를 놓아주는 것”

패트리스 존스는 『에로스와 생태 방어』에서 욕망을 결핍으로 보는 전통적 개념에 반하여, “에로스가 우리의 동물 신체의 몸 안에서 발생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향해 밖으로 뻗어나가며, 그것을 얻기 위해 분투하면서 연결을 추구”하는 긍정적이고 확장적인 의미로 보았다. 현대의 소비 중심의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경제가 양산하는 재생산에 대한 집착은 인구 과잉과 기후 변화를 초래하여 재앙적인 환경을 초래했는데, 이것은 비생산적인 퀴어 에로스를 억제한 원인이자 결과라는 것이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시인이자 활동가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에로스”가 육체적 사랑과 성욕뿐만 아니라 “신체적, 감정적, 심리적, 지적인 공유”이며, 이것은 “공유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패트리스 존스는 “에로스가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보여주며 거기에 이르기 위한 에너지를 준다. 그러나 에로스는 또한 너무 쉽사리 둔감해지거나 오도된다. 에로스는 우리가 스스로와 서로를 구원할 수 있게 해주며, 지구를 난파시키지 않도록 해주지만, 그러려면 세심하게 육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퀴어 에로스는 행복한 상태의 원인이자 결과로서, 행복한 상태에서는 삶이 희소성에 직면하여 재생산하려는 암울한 투쟁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 태양에서 비추는 여분의 에너지를 기쁨으로 사용하는 잉여적이며 바깥으로 향하는 연결과 관대함이 있다”고 보았다. 에로스는 우리의 동물적 몸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생태주의적이며, 가로막히지 않고 방향 전환되지 않은 에로스는 생물권 균형의 방향으로 흐를 것으로 보았다.

에로스를 억제하고 부정하는 호모포비아와 종차별주의는 (그외 모든 –주의도) 구체적이지 않은 이념이다. 그래서 에로스가 부재한 동물해방 기획은 추상화의 영역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에로스에 대한 억제는 우리의 동물적 자아를 억압하여, 욕망으로부터 단절시키고, 나아가 다른 이들로부터도 우리 자신을 단절시켜서 우리의 감정과 관계를 죽이게 된다.

페트리스 존스는 질문한다. “자신과 단절되고 다른 이들과 단절된 존재들이 어떻게 돌봄의 해방적 윤리를 실천하겠는가?” 그는 이제 에코페미니즘은 모성적인 돌봄이 아니라 에로스의 돌봄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로스는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실제의 몸의 해방을 다루기에 돌봄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으로서 실행한다.

‘금욕’의 윤리를 넘어서 욕망에 대한 긍정하는 에로스는 종마다 각기 다른 욕망들을 섬세하게 고려하고 돌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에로스는 생명체를 관계적 존재로 정의하여 다른 종과의 실질적인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윤리에 기반해 생태 방어의 메커니즘으로서 순기능한다.

매일의 삶에서 자본주의의 식민화를 경험하는 오늘날, 친밀한 폭력과 고질적 차별과 착취가 있는 사회에서 싸우라 하지 않고 황주영 활동가는 사랑하라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그는 다른 욕망을 이야기 한다. 성애적인 해방이 인간을 자연과 문화 모두에 대한 동등한 참여자로서 재개념화 할 것이라고 말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에게 퀴어를 통해 같은 연합에 있는 여성과 자연을 함께 수립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필자 이미숙(몸꿈춤공간 미류). 미국문학박사. 『다시 태어나는 여신』 공저.
필자 이미숙(몸꿈춤공간 미류). 미국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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