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화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동행동은 '처벌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낙태죄' 완전 폐지하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수형 기자
지난 10월 8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처벌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기자회견을 열고 항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홍수형 기자

 

미국 최초 여성 부통령이자, 최초 흑인 및 아시아계 부통령으로 당선된 카말라 해리스(Kamala Harris)는 상원의원으로 활약하는 동안 많은 명언을 남겼다. 달변가이자 전략가인 그녀는, 주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국정감사 스타’ 혹은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면서 주목을 받곤 했다. 특히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은 그녀의 주특기여서, 인사 청문회에 참석한 후보자들이 그녀의 질문 하나에 쩔쩔매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적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되었던 사례는 아마도 연방 대법원 대법관 후보 브렛 캐버나(Brett Kavanaugh)의 인사 청문회였을 것이다(현재는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재직 중이다). 브렛 캐버나는 도널드 트럼프가 지명한 보수 성향의 판사다. 각종 법안에 대해 극도로 보수적인 입장을 표명해왔던 그는 특히 여성의 재생산권을 부정하고 낙태죄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청문회를 준비하던 의원들은 그가 낙태의 범죄화를 막는 최소한의 입법 장치(절대 충분하거나 진보적인 내용은 아니다)인 1973년의 대법원 결정(Roe v. Wade)을 뒤집을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자연히 여러 의원들이 집중적으로 낙태죄 관련 질문을 던졌다.

카말라 해리스도 그에게 낙태죄에 대한 의견을 물었던 의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낙태죄 자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는 대신, 발상을 뒤집어 이렇게 질문한다.

“남성의 몸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정부에게 주는 법안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도 몇 분만 시간을 내어 함께 생각해보자. 남성의 몸에 대한 의사결정을 정부가 대신 내려주거나, 강제하거나, 통제하는 법령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브렛 캐버나는 질문을 받고 크게 당황한다. 무안한 듯 버벅거리던 그는 “혹시 질문을 좀더 구체적으로 해주실 수 있는지” 반문하며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그런 법안은 없는 것 같다(“어떤 법안도 생각해 낼 수가 없다”)고 답변한다. 그의 답변을 듣고 카말라 해리스는 예상했다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당연하다. 그런 법안은 없기 때문이다.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동취재사진)
김남국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동취재사진)

 

“낙태죄 남성 인식” 물은 김남국 의원

오랜 가부장제에 기대어 형성된 근대 법 체계는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법 제정 및 행사 과정에서도 여성의 경험보다 남성의 견해가 우선시된다. 며칠 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낙태죄 개정안 공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남국 의원이 “낙태죄 폐지에 대한 남성들의 생각은 어떤지, 20대~30대 남성들이 낙태죄 입법예고안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지, 낙태죄 폐지가 과연 남성 주류의 시각이 맞는지” 물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즉자적으로 이를 보여준다. 굳이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고 믿고 수 차례 반복해서 언급했다는 것은 ‘남성 일반’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낙태죄로 인해 범죄자로 처벌받는 것은 여성 뿐이다. 만약 ‘생명 존중’의 가치를 빌려 낙태가 범죄라고 말한다면, 원인 제공자인 남성과 여성 모두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신기하게도 남성에게 책임을 묻는 법은 존재한 적이 없다. 사실 상황은 그 반대다. 불법 낙태로 인해 여성이 범법자가 된다는 점을 악용하는 가해자들이 많았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도록 만든 바로 그 남성들이 오히려 “네가 낙태했다는 것을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협박하거나, 돈을 갈취하거나, 폭력을 행사해왔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남성도 처벌하자는 뜻이 아니다. 낙태를 비범죄화하자는 것이다.)

KBS 9뉴스에 공개된 방송인 사유리씨와 아들. ⓒ KBS
KBS 9뉴스에 공개된 방송인 사유리씨와 아들. ⓒ KBS

 

남편 없이는 임신이 불가능한 한국

낙태죄는 여성의 몸과 삶을 통제하고, 여성의 자율적인 결정권을 박탈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여성의 몸에 대한 결정, 그리고 재생산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주체는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여성이지 정부가 아니다. 임신과 출산의 경험과 그 영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도 여성이다. 하지만 현행 법체계는 이같은 자율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최근 후지타 사유리가 비혼모의 삶을 살기로 결정하면서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서는 여성이 독립적으로 정자 기증을 받아 임신하는 것조차 불법인 상황도 이를 잘 보여준다. 남편 없이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 심지어 부부가 체외수정으로 아이를 갖기를 원해 남편의 냉동 정자를 보관해 둔 경우에도, 남편이 사망하면 그 순간 아내 혼자만의 임신은 불법이 된다고 한다. 결국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는 생각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낙태를 비범죄화한다고 해서 낙태가 급증하지 않는다. 낙태가 합법화되면 시술 사례가 통계로 온전히 잡히는데도 그렇다. 그 누구도 자신의 몸에 해로운 침습적 시술을 함부로 받으려 하지 않으며, 생명을 경시하는 여성들이 손쉽게 낙태를 할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음지에서 불법 시술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낙태의 합법화는 많은 여성들의 건강과 생명을 지킬 것이다.

카말라 해리스가 우회적으로 지적했듯이, 남성의 몸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정부가 갖도록 하는 법안은 없다. 남성의 몸은 당연히 남성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김정희원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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