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한 해를 갈무리하는 말로 흔히 다사다난(多事多難)하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올해도 참 다사다난했지.’ 말하며 작게 내쉬는 한숨에는 자신을 포함해 힘든 일을 겪어낸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가 숨겨져 있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좋은 일들만 가득할 것이라는 간절한 희망과 함께 말이다.
‘희망, 그것은 인간의 가장 큰 힘인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의 근원이 되는 인간들의 전형적인 망상’이라고 영화 매트릭스 속의 아키텍트는 말한다. 그의 말처럼 희망은 현실의 빈궁함을 자기 스스로 감추며 시스템이 의도하는 ‘노오력’하는 인력으로 살게 만드는 기만적인 장치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기득권자들이 하늘에 띄우는 더 나은 내일이라는 무지개는 그렇게 절망을 감춘다.
2020년 서울의 집값이 하늘을 찔렀다.
경실련 자료에 의하면 올해 5월 기준 서울시 전체 주택가격은 2,498조원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하기 전인 2017년 5월 1863조원에 비해 34%인 635조원이 올랐다. 서울 집 한 채 평균 가격은 7억 1000만원이다. 정부의 말을 믿지 않고 사람들이 영혼까지 끌어 모아 집을 사는 건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반면 정부의 말을 신뢰했던 사람들은 이제 집값을 안정시키겠다는 메시아의 등장을 갈망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생각해보면 문재인 정부 부동산 정책의 시작을 지휘할 인물로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수석이 결정됐을 때부터 지금의 결과는 예측됐어야 한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부동산 폭등에도 일정 부분 지분이 있는 인물이 아닌가. 부동산 시장이 돌아가는 현실은 보지 않고, 집이 사람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생각하지도 않고 이론과 이론 사이만 오가며 낙관 섞인 전망만을 내놓았던 그였다.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가치가 12억이 오르는 동안에도 그는 초지일관 시장은 안정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만 던졌다.
현 정부의 희망전도사에서 빼면 안될 사람이 장하성 주중대사이다. 그는 청와대 정책실장에 근무하던 시절 ‘소득주도성장론’을 설파하며 국민들에게 밝은 내일을 약속했다. 2017년 당시에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비판과 개선 요구가 이어지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낙수효과는 환상이기 때문에 분수 효과가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그의 말은 지금까지는 실패로 드러났다. 총수요와 임금인상의 문제만 생각하고, 총공급과 임금인상의 관계를 간과한 결과이다. 2019년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를 보면 소득상위 20%와 소득하위 20%의 소득 상하위 격차는 통계 작성 후 최대치로 나타났다. 이 집단들 사이의 근로소득 격차는 15배 이상 벌어진 상태이다.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과정에서도 희망 공급은 멈춤이 없었다. 과잉 공급된 희망을 매일 먹고 마시다 보니 K-방역이라는 말에 안심하곤 했다. K-방역이라는 단어에서 전염병에 걸려 고통받거나, 감염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찾기 어렵다. 비교우위를 통해 랭킹이 정해지는 게임이라도 하는 듯 매일매일 다른 나라와 경쟁하는 만족감만이 보일 뿐이다.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며 우리 내부의 고통을 상쇄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봐도 괴기스럽다.
2020년 한국의 서발턴들에게 뿌려진 희망에는 근거가 없다.
2021년도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 정권의 주축인 586들은 듣기 좋은 단어의 조합을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며 시민들을 현혹할 것이다. 자신들이 기득권이 되었음에도, 기득권 세력을 해체해야 한다는 사기극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진보를 참칭하며 극우 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자산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일을 민주주의 정신의 승리라 말할 것이다. 늘어가는 그들의 자산과 권력을 끼리 끼리 나눠 먹고 키워주며 이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니 국민들은 자신들을 믿고 따라오면 될 뿐이라고 할 것이다. 모든 개혁의 1차 수혜자는 자신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시민들을 동원하는 그들의 모습은 80년대 부터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다. 특정 집단의 능력과 선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간다는 것의 허망함을 2020년의 시민들은 알아가고 있다.
이제 희망을 넘어서야 할 때이다. 우리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어줄 사람을 어디에도 없다. 희망을 버리면 절망이지만, 희망을 넘어서는 것은 절망을 직시하고 용기있게 나설 때 가능하다. 그 때 우리 보통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게 된다. 공감하고 연대하며 나의 목소리에서 시작해, 우리의 목소리로 가득한 새해가 될 수 있도록 용기를 내자.
올 한 해 평범하게 사시느라 다들 수고 많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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