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만화 『나, 여기 있어요』 펴낸 디담·브장 작가
만화계 내 성폭력 최초로 알린 피해 당사자

여성신문은 그간 다양한 젠더폭력 생존자들을 만났습니다. 우리 사회가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았던, 젠더폭력 피해 ‘이후’의 삶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통념과 편견도 비판적으로 고찰했습니다. 이 기획이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 사회의 성평등 담론 확산에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한국에서 ‘미투(#MeToo)’ 운동이 시작되기 4년 전인 2014년, 잠잠하던 만화계 내에서 최초로 성폭력 피해 공론화를 시도한 여성이 있었다. 웹툰 작가로 일하고 있는 디담, 브장 작가는 피해 사건 발생 이후 6년이 지난 2020년 12월 『나, 여기 있어요』라는 만화를 펴냈다. 공론화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재판 이후 피해자는 어떠한 시간을 보냈는지,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렸다. 

만화계 내 성폭력 최초 공론화 사건의 피해 당사자가 직접 그리고 쓴 만화 『나, 여기 있어요』. ⓒ교양인
만화계 내 성폭력 최초 공론화 사건의 피해 당사자가 직접 그리고 쓴 만화 『나, 여기 있어요』. ⓒ교양인

 

직접 겪은 피해 사건을 만화로 다시 구성하기까지

2014년, 유명 만화가의 화실 어시스턴트로 지내던 ‘현지’는 출근 첫날부터 성희롱과 성추행,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까지 당하게 된다. 모든 컷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건 그대로를 재현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피해가 심각했는가’에 집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브장: ‘현지’라는 만화 속 인물의 이야기는 제가 실제로 겪은 내용입니다. 『나, 여기 있어요』에서는 제가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받았는지, 얼마나 억울한지가 아니라 성폭력이 일어나는 구조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사건의 폭력 요소, 언어 등은 최대한 순화하려고 했어요. 만화계뿐만 아니라 대다수 예술계 내 성폭력 피해가 유사한 양상을 보이거든요. 그래서 사회 초년생들, 예술계 종사자들이 읽으며 공감할 수 있는, 최대한 폭력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지 않은 책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책은 주로 차별이나 폭력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읽게 되는데, 극단적인 내용이나 폭력적인 묘사가 들어가면 피해자들에게 ‘트리거(방아쇠)’로 작용할 수도 있잖아요. 최대한 담담하게 읽히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디담:  당사자의 입장에서, 또 그 이후 업계를 떠나지 않은 당사자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만화 소비자나 만화계에 관심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 여기 있어요』의 모델이 된 성폭력 사건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사건이 일어났다, 공론화됐다, 가해자가 처벌받았다는 것 이후로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어요. 대개 조사나 재판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난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실제 당사자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죠. 제 경우 만화를 오래 그렸지만 어시스턴트나 문하생 생활을 해본 적 없어요. 같은 작가 직군에 있는 사람이어도 모를 수 있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포괄적인 정보성을 지녔다고도 생각합니다. 형사처벌이나 재판 과정 등을 비교적 자세히 그리기도 했고요.

"모두가 나의 일상의 회복보다는 가해자의 처벌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 여기 있어요』 257페이지. ⓒ교양인
"모두가 나의 일상의 회복보다는 가해자의 처벌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 여기 있어요』 257페이지. ⓒ교양인

브장 작가는 만화계 내 성폭력 사건의 피해 당사자다. 디담 작가는 또 다른 성폭력 사건 피해자 방청연대에서 브장 작가를 만나 함께 책을 구상하고 만들었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는 많은 고민과 조율이 필요했다.  

브장: 저는 업계에 계속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 굉장히 조심스러웠어요. 만화계에서 다른 피해자가 있다는 얘기가 (제가 폭로한) 이후에도 전혀 나오지 않았거든요. 피해자가 더 없는 줄 알았어요. 괜히 ‘나 한 명의 일인데 만화계 전체를 싸잡아서 모욕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디담: 브장 작가가 이 작품을 그리며 많이 힘들어했어요.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논의하다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다양성만화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됐어요. 브장 작가는 문화예술계 성폭력 교육 강사나 피해자 상담 등 지원 활동을 해와서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과거의 사건을 복기하고 이야기로 만드는 게 힘든 작업이라는 걸 많이 느꼈어요. 

피해 당사자인 브장 작가가 먼저 이야기를 구성하면, 디담 작가가 빼거나 강조할 만한 부분, 전달하려는 메시지 등을 조언했다. 콘티 작업도 함께 했다. 단순히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만화 자체도 몰입감을 주고 싶어 ‘주인공’의 유년 시절과 가정환경에서 출발했다. 

브장: 여성들은 일상 속에서 성차별이나 성폭력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돼요. 성폭력 피해자에게 이런 말을 쉽게 하게 되죠. “왜 그때 집에 안 들어갔어?” “그거 포기했으면 됐잖아.” 그런데 사실 피해자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개인적인 상황이 있거든요.

2018년 미투 운동, 분기점이 되다

피해를 겪은 후, 브장 작가는 최대한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투 운동이 시작되면서 자신과 매우 유사한 피해를 많은 이들이 겪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브장: 미투 운동이 제게도, 많은 피해자들에게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거죠. 저를 도운 분이 자신이 겪은 범죄를 고발하고, 인터뷰한 직후 제게 전화해서 “네 덕에 내가 말할 수 있었다”고 했어요. 제 사건 이후 한두 차례 다른 고발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제게 2차 가해를 했던 만화협회가 대처를 열심히 잘하는 거예요. 성폭력 가해자가 무혐의 판결을 받아도 무조건 제명하기도 했고요. 그때마다 피해자들이 저한테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이전엔 무조건 숨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미투 운동 덕분에 ‘내 잘못은 아니구나’ 알 수 있게 된 거죠. 업계 자체도 미투 운동 이후로 너무나 달라졌어요. ‘그런 말은 2차 가해야’라고 말하는 분위기도 생겼고, 억지로 술을 권하거나 스킨십이나 성희롱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렇게 하지 마세요’고 하는 사람도 생겼고요.

디담: 피해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미투 운동을 통해서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피해를 목격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사람들도 좀 더 많아졌다고 생각하고요. 

브장 작가가 직접 보여준 형사사건 판결문. ⓒ브장 작가 제공
브장 작가가 직접 보여준 형사사건 판결문. ⓒ브장 작가 제공

 

2차 가해를 견디며 업계 내부에서 생존한다는 것 

만화계, 웹툰계는 이른바 ‘좁은 업계’다. 작가도 많고 시장도 크다지만 한두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 이름은 들어본 사람이다. 브장 작가는 “피해 이후 업계 내부에서 2차 가해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브장: 만화에서 전부 다루진 못했지만 어이없는 일도 굉장히 많았어요. 이 사건이 만화협회와도 연루돼 있었거든요. 다른 작가들이 협회에 “그 사건 왜 제대로 처리 안 하냐”고 문제 제기했어요. 정작 저는 거기에 없었어요. 피해자를 도와야 한다고 싸우면서 오히려 뒤에서는 2차 가해를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권 싸움을 하고 있었더라고요. 『나, 여기 있어요』 출간 이후 협회와 연락할 일이 있었는데 책 이야기는 나오지 않은 채 통화가 끝났어요.

그때는 가해자 편에 섰던 업계 사람들이 계속 기억나고, 그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숨어 지냈어요. 그게 억울할 때도 있고 그 사람들이 미울 때도 있었는데, 당시 사회적 분위기도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제게 2차 가해를 했던 작가들 중에는 이제는 어떻게든 피해자들을 도우려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어지는 기사 ▶ 만화계 성폭력 첫 공론화한 작가, 여전히 만화 그리며 잘 삽니다 www.womennews.co.kr/news/205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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