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큐]는 여성신문에서 제안하는 여성 관련 도서 큐레이션 시리즈입니다. 여성 작가들을 재발견하고, 여성 이슈를 재조명하며, 관련 도서를 선별하여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주제에 걸맞은 책 속 문장을 담습니다.

올겨울, 눈 내리는 풍경이나 눈이 쌓인 바깥을 바라보며 읽기 좋은 여성 작가의 9권을 꼽았다. 제목에 눈이 들어간 책도 있고, 겨울이 배경인 책도 있다. 2020년 출간된 문학 도서로 한정했다. 

고요하게 읽는 여성들의 시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 이규리 ‘당신은 첫눈입니까’ 중

“솜이불 밖으로 나온 두 개의 발이 / 너무 차가워서 어루만져주었다 / 여러 개의 작은 발들로 늘어났다 // 방학에는 얼마든지 늦잠을 자렴 / 잃어버린 걸 찾기 전에는 눈뜨지 말렴” - 한연희 ‘겨울방학’ 중 

“눈이 왔으면 좋겠다 // 너는 혼잣말을 하고 // 그러면 발자국이 생길 거야 //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임승유 ‘연애’ 중

공교롭게도 세 시집 모두 눈 또는 겨울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다채로운 계절감을 담은 구절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기 좋다. 눈이 내리는 동안 시를 읽다 보면 주변은 좀 더 고요해지고 시간은 조금 더 느리게 흐를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 냄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 황정은 『연년세세』 중

추석 지난 뒤, 땅이 얼기 전에, 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황정은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어머니와 자매의 삶을 통해 한국사회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누군가의 뒷모습이나 쓸쓸한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겨울만 한 계절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을 닮은 작품이다.

“사람을 한번 만나면 그 사람의 삶이랄까, 비극이랄까, 고통이랄까 하는 것이 옮겨오잖아. 하물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억울하고 슬프고 손해보고 뭔가를 빼앗겨야 하는 이들이야. 이를테면 판사는 그때마다 눈을 맞게 되는 것이야. 습설(濕雪)의 삶이랄까. 하지만 눈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빨리 털어내야 한다고.” - 김금희 『복자에게』 중

한 사람의 인생을 꺾이고 무너지게 하는 ‘실패’에 관한 소설이다. 가세가 기울어 제주로 이주해 유년을 보낸 인물이 훗날 판사가 되어 또한번 제주로 좌천되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슬픔을 느끼다가도 “따귀를 갈기듯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이를 꽉 물”게 되는 제주에서 주인공은, 그리고 독자는 어떤 강인함을 품게 될까.

“아, 허물. 허물을 벗을 수 있다고 그랬어요, 동면을 해야만요. 그게 꼭 동면은 아니더라도, 몸을 일부러 차갑게 만들고 주변 온도를 낮추고 나야 또 그 다음 해를 살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던가, 뭐 그랬거든요.” - 강민영 『부디, 얼지 않게끔』

어느 날 변온인간이 됐다는 것을 깨달은 한 여성(‘나’)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직장동료 ‘희진’과 ‘나’의 잔잔하고 단란한 연대를 그렸다. ‘변온’ 상태가 되면 우리에겐 어떤 온기가 필요해질까. 두 여성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매서운 겨울을 지나 ‘안전한’ 봄에 당도할 수 있길 바라게 된다.

이국적인 겨울의 색채

“눈의 세상에서 선명해지는 건  /아무것도 아닌 존재 / 작고 희미한 것 /새의 발자국과 옅은 그림자” - 아주라 다고스티노 『눈의 시』 중

이탈리아 여성 작가 아주라 다고스티노가 그려낸 겨울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스페인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에스테파니아 브라보의 따스한 그림과 함께 쓰인 시 그림책이다. 차고 흰 겨울 공기 속에 존재하는 작은 온기를 담아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춥다’라는 특성을 가진 말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나는 추운 데 갈 수만 있다면 모든 걸 감내할 수 있었다. 얼음 여왕의 아름다움. 소름이 돋는다는 기분. 얼음처럼 차가운 진실. 또 손발이 차가워지는 용감한 곡예. 모든 경쟁자들을 창백하게 만들고 얼어붙게 하는 재능. 고드름처럼 아주 날카롭게 갈린 이성. 차가움의 영역이란 이렇게 정말 넓다.” - 타와다 요코 『눈 속의 에튀드』 중

일본에서 태어나 독일로 이주하여 2개 언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 타와다 요코의 근간. 독일 베를린 동물원의 유명한 아기 북극곰 크누트의 실제 이야기에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져 탄생한 소설이다. 추위와 얼음 등 겨울 이미지가 가득하다. 북극곰이 화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음울한 계절이면 내가 찾아다니는 이런저런 사소한 광경이 있다. 미세한 식물학적 지표들, 결국에는 봄이 오고 말 거라며 나를 안심시켜주는 기분 좋은 신호들이다. 지난달에 나타난 시양채와 갈퀴덩굴 새순처럼 이 꽃차례 배아도 그런 신호 중 하나다.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밤은 짧아질 것이며 내 생각들도 다시금 밝아지고 가벼워지리라.” - 에마 미첼 『야생의 위로』 중

25년간 우울증을 겪은 박물학자의 회고록. 극심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날 어떻게든 바깥으로 나가 숲을 걷고, 꽃과 동식물을 바라보며 산책한 열두 달의 시간을 담은 에세이다. 아름다운 사진과 스케치, 수채화가 더욱 선연한 계절의 감각을 일깨운다. 야생으로의 여행이나 산책이 어려운 이 시기에 펼쳐 들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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