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페스’가 남성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한다며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 나흘 만에 20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사진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쳐
‘알페스’가 남성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한다며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 나흘 만에 20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사진 =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캡쳐

 

'알페스'(RPS·Real Person Slash) 논란을 보고 파시스트라 불렸던 여자들이 기억났다. 알페스는 실존 인물을 소재로 허구의 애정 관계를 다룬 글과 사진, 영상물 등을 뜻한다. 이에 따라 'SNL' 등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동성애 코드도, 팬덤 문화의 산물인 팬픽도 알페스로 분류할 수 있다. 오랜 시기 팬덤 내부 마이너 문화로 치부되던 알페스는 어느 날인가 래퍼 몇 명에 의해 사회적 논란으로 발전했다. 알페스를 공론화한 래퍼들은 알페스가 성폭력의 일종이라 주장했다. 곧, 알페스 관련 국민청원이 등장했고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알페스 처벌법’이라는 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하 의원은 알페스를 “제2의 n번방”이라 칭했다.

신기하게도 하 의원과 나는 완전히 다른 과정을 거쳐 다소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바 있다. 하 의원은 알페스를 처벌하기 위해 성폭력 특별법 14조 처벌 대상에 글과 그림, 웹툰을 추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작년 웹툰 내의 성폭력적인 묘사들에 대해 제재 규정이 필요하다 주장한 적 있다. 두 주장이 다소 비슷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알페스인지, 아니면 여성혐오 웹툰인지는 큰 차이를 불러 일으켰다. 전자는 하태경 의원을 비롯한 남성들이, 후자는 파시스트라 불린 여자들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권력형 성범죄가 사회를 뒤흔들던 작년 여름, 한 무리의 여자들은 <여혐왕 기안84 네이버웹툰은 혐오장사 중단하라>라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여성 혐오 웹툰에 대해 제재 정책을 만들라는 것이 주 요구안이었다. 우리는 네이버 유저들 아이디를 모아 요구안과 함께 네이버 웹툰 측에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그런데 기자회견 이후 난데없이 웹툰협회에서 “기안84 퇴출 요구는 파시즘”이라며 비난조의 논평을 올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파시스트라 불려본 순간이었다. 얼마 후에는 유명 만화가가 기안84 웹툰 여성혐오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을 “시민 독재”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파시스트를 넘어 독재자가 되던 순간이었다.

여성혐오 웹툰 반대 기자회견을 개최하며 들었던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알페스 반대 운동을 하는 일군의 사람들로부터 다시 듣고 있는 기분이다. 알페스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은 파시스트라는 비난도, 독재자라는 비난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남자라서 또는 여자라서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성폭력을 치환한 후 피해자로 상정되는 ‘미성년자 남성 아이돌’과 가해자로 상정되는 ‘10대~30대 여성’을 강조할 뿐이다.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알페스의 가해자가 젊은 여성이길 바라는 모순적인 심리 속에는 “너네 여자들도 잘못했잖아!”라는 외침이 숨어있다. 그래서 알페스 운동은 ‘미성년자 남성 아이돌’의 권리 쟁취 운동이라기보다는 파시스트로 불린 여자들의 입을 다시 한 번 막기 위한 운동에 가깝다. ‘미성년자 남성 아이돌’의 열악한 노동권도, 불합리한 수익 구조도, 착취적인 마케팅 전략도 지적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시스트라 불린 여자들의 언어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지겠지만 대대손손 그랬던 것처럼 파시스트라 불리는 여자들은 끊임없이 살아가며 많은 것들을 주장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하태경 의원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발의할 법안의 이름을 “여성혐오 웹툰 제재법”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보길 바란다.

신민주 기본소득당 젠더정치특별위원회 위원장. ⓒ기본소득당
신민주 기본소득당 젠더정치특별위원회 위원장. ⓒ기본소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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