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데이트폭력 생존기 다룬 만화
『다 이아리』 펴낸 이아리 작가
“가해자가 행복하길, 그래서 찾아오지 않길”
빌 수밖에 없는 처참한 현실 고발

여성신문은 그간 다양한 젠더폭력 생존자들을 만났습니다. 우리 사회가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았던, 젠더폭력 피해 ‘이후’의 삶은 어떤지 물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통념과 편견도 비판적으로 고찰했습니다. 이 기획이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리 사회의 성평등 담론 확산에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웹툰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시드앤피드 제공
웹툰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시드앤피드 제공

“덕분에 남자친구를 고소합니다.” “작가님 만화를 보고 이별을 결심했어요.”

인스타그램에 올린 만화는 힘이 셌다. 이아리 작가의 메일함은 늘 가득 찼다. 작가처럼 데이트폭력을 겪었다는 사연이 일주일에 70통씩 날아들었다. 대부분 여성이었다. 남성과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 작가는 데이트폭력이란 “불행한 소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임을 확신했다.

그는 2018년부터 SNS에서 웹툰 ‘다 이아리’를 연재했다. 20대 때 겪은 데이트폭력과, 그 이후의 삶을 그린 만화다.

‘미투(#MeToo)’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젠더폭력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르던 때 연재를 시작했다. 성차별·성폭력을 다룬 웹툰은 있어도, 데이트폭력을 피해자의 관점으로 다룬 웹툰은 없었다. 이 작가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는 금세 10만 명을 넘었다. ‘다 이아리’는 네이버 도전웹툰과 다음웹툰 1부 리그에 올라 누적 120만뷰를 기록했다. 2019년 9월 종이책(시드앤피드 출판)으로도 나왔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수신지 작가 등이 추천한 작품으로 입소문이 났다.

웹툰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시드앤피드 제공
웹툰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시드앤피드 제공

평판 좋은 남자, 알고보니 데이트폭력 가해자
무력함과 바닥난 자존감에 고통받는 피해자 심리 그려

‘다 이아리’는 데이트폭력 가해자가 ‘괴물’이 아니라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인기 많고 평판 좋던 남자였지만 여자친구 앞에선 돌변했다.

동글동글 정감 가는 그림체에 자극적 묘사도 없다. 그래도 편안하게 읽을 만화는 아니다. 용기를 냈다가도 무력함과 바닥난 자존감에 괴로워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건강한 관계를 맺기 어려워 자책하는 피해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피가 아직 맺힌 상처를 남에게 보이기도 어렵지만, 상처를 봉합해 새 살이 돋는 모습을 공개하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이 작가는 가해자가 사라진 후에도 문득 자살을 고민한 순간, 정신과 진료 과정, 실패한 연애들과 지금의 남자친구 이야기도 낱낱이 공개했다. 격려와 지지도 많았지만 오해와 악플도 겪었다.

“언제까지 피해자로 살 거냐는 말, 피해자 역할에 빠져있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었어요. 그 일이 없었다면 저는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는 게 겁나지 않았을 거예요. 상대를 크게 의심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저 자신을 검열하지도 않을 거예요. 자존감도 훨씬 높고 당당할 거고요.”

웹툰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시드앤피드 제공
웹툰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시드앤피드 제공

다른 피해생존자들 댓글·메일 쏟아지면서
“공론화 책임감” 생겨...2년간 인터뷰·강연 등 활동

이 작가에게 힘이 된 건 같은 처지의 피해생존자들이었다. 댓글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응원이 고맙고, 심한 데이트폭력을 겪은 여성들이 너무 많아 안타까웠다. “이 문제를 공론화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지난 2년간 인터뷰, 토크쇼, 강연 등 기회가 될 때마다 데이트폭력 문제를 알리려 노력했다. 책에도 연재 당시 달렸던 댓글, 이메일로 모은 또 다른 ‘이아리’들의 사연을 추가했다.

가장 기쁜 순간은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만화를 보고 용기를 낼 때다. “제 만화를 보고 이별을 결심했다는 분, 고소를 진행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분들이 계세요. 정말 큰 용기거든요. 그런 용기를 얻었다는 사실이 참 뿌듯하고 좋았어요. 그래도 제 만화가 작은 도움이 되기는 하는구나 싶어서요.”

웹툰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이아리 작가는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만화를 보고 이별이나 고소를 결심하며 용기를 낼 때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시드앤피드 제공
웹툰 ‘다 이아리’의 한 장면. 이아리 작가는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만화를 보고 이별이나 고소를 결심하며 용기를 낼 때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시드앤피드 제공

목숨까지 빼앗는 데이트폭력...법제도 개선은 더뎌
“가해자가 행복하길, 그래서 찾아오지 않길”
빌 수밖에 없는 처참한 현실 고발

여전히 생존자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더디다. “아직 저를 포함한 여성들의 목소리에 한국 사회가 ‘응답’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데이트폭력’이 심각한 범죄라는 걸 어느 정도 깨닫긴 했으나, 그걸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나 절차는 아직 미흡하니까요. 그래도 언젠가는 달라지지 않을까요. 더 많은 논의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만화는 가해자의 접근을 막을 법적 근거가 없는 현실, 경찰이 ‘가해자 인생에 빨간 줄 긋고 싶냐’며 도리어 피해자를 탓하는 현실도 꼬집는다. 피해자의 온라인 메신저 비밀번호, 집 주소, 가족·친구까지 속속들이 아는 가해자가 두려워 피해자가 수차례 집을 옮기고, SNS 계정을 삭제하고, 전화번호를 계속 바꾸며 도망치는 게 최선인지 묻는다.

2019년 경찰이 접수한 데이트폭력 신고 건수는 1만9940건이다. 형사입건 수는 그 절반 수준인 9868건이다. 폭행·성폭력 등 범행이 발생해야만 수사기관이 개입할 수 있다.

가해자는 대부분 풀려나 다시 피해자를 찾아간다. 끝내 피해자의 죽음으로 끝난 사례도 매년 보고됐다.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2019 분노게이지의 통계분석’에 따르면 남편·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살인·살인미수 피해자가 2019년 1년간 229명이다. 가정폭력처벌법 대상에 데이트폭력을 추가하는 내용의 법안이 수차례 발의됐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가해자의 행복을 빌고 또 빌었다. 정말정말 행복해서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기를....” 2년이 지났지만 이 작가의 말처럼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이 처한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다. 정부와 국회의 직무유기다.

이어보기 ▶ 연애하고 만화 그리는 데이트폭력 생존자...‘피해자다움’은 없다 www.womennews.co.kr/news/206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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