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히다 서다 인생과 닮은꼴

박혜란 여성학자

스포츠 중계를 듣다 보면 어떤 종류의 스포츠든 해설하는 사람이 누구든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 있다. 극적인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거의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말, “야구는 바로 인생이에요” “축구는 인생과 닮은꼴이에요.” 하는 말이다. 물론 마라톤 중계에서는 몇 번씩이고 “아! 마라톤은 우리 인생의 축소판입니다”는 감격에 겨운 말을 듣게 된다. 또 바둑 중계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골프도 물론이고.

맞다. 모든 스포츠는 인생이다. 잘나갈 때가 있는가 하면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고 위기에 부딪히다가 아슬아슬하게 벗어나기도 한다. 처음에는 죽을 쑤다가 7전 8기, 기사회생하기도 한다. 또 승리는 맡아 놓았다는 듯 승승장구 콧노래를 부르면서 고지가 저기라고 큰소리치더니 막판에 꽝! 추락하는 일도 숱하다.

어쩐지 이야기를 꺼내는 폼새가 아마 요즘 떼거지로 추락하는 정치인이나 기업가 이야기를 에둘러 하려는 모양이라고 지레짐작하지 마시길. 나는 도대체 에둘러 이야기하는 데에는 소질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냥 모든 스포츠가 인생이듯이 내가 노상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인 버스도 인생이라는 아주 단순한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요즘은 지하철보다 버스를 타는 일이 더 잦다 보니 철학자도 아닌 주제에 날마다 인생을 생각하느라고 바쁘다.

살다보면 예상대로 되는 게 있던가?

엊그제도 그랬다. 우리 아파트 단지를 나오면 길을 건너야 광화문행 버스 정류장이 있다. 녹색등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버스가 오더니 금방 떠나 버렸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하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신호가 떨어져 길을 건너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 다음 버스가 쌩하고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닌가. 아이쿠, 예감이 안 좋았다. 과연, 그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무려 28분을 기다려야 했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한 건 당연했다. 앞차가 금방 지나갔으니 뒷차는 한참 있다가 오리라는 예상이 무참하게 깨진 거다. 그러니 그게 인생이 아니고 뭔가. 살다 보면 예상대로 되는 게 있더냐고?

그뿐인가.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보면 다른 버스들은 그리도 자주 오는데 내 버스만은 번번이 왜 한참 있다가 오는지. 기다리다 못해 택시를 잡으면 바로 꽁무니에 내 버스가 따라오는 건 또 뭐냐고. 특별한 행운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저 평균만 됐으면 하고 바라는데도 유독 나만 빗겨 가잖아, 그러니 버스를 인생이라고 안 하겠나?

아무튼 간신히 버스를 탔다고 쳐. 편안하고 안전하길 바라는 건 애시당초 꿈이다.

가끔씩 쨍하고 해뜰 날도 있겠지

기사 아저씨 취향대로 고정시켜 놓은 시끄러운 라디오나 뽕짝 테이프의 무차별 공세, 지그재그 난폭운전에 타자마자 스트레스 팍팍이다. 아저씨, 제발 라디오 좀 줄여주시고요, 차 좀 살살 몰아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맘 굴뚝 같지만 후환이 두렵다. 박봉에 과로에 폭발직전의 폭탄을 공연히 건드렸다 무슨 꼴을 당할라고. 그렇다고 중간에 내리자니 시간도 쪼들리고 차비도 아깝다. 한번 올라탄 버스, 그냥 목적지까지 숨죽이고 가는 게 상수다 싶으니 이것 또한 인생이다.

길이 좀 뚫렸다 싶으면 총알처럼 달리다가 막힐 땐 갑자기 섰다가 때로는 하염없이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 뚫림과 막힘과 멈춤이 시도 때도 없이 반복되는 것, 갑자기 멈출 때마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욕설, 그 모습도 인생과 닮은꼴이다. 순탄하기만 한 인생이 어딨겠어. 가다 막히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제일 나중에는 영원히 서 버리는 거지 뭐.

가끔, 아주 가끔, 기분 좋은 버스를 만날 때가 있다. 기사 아저씨, 밝은 표정으로 어서 오세요 인사하고 손잡이를 안 잡아도 넘어지지 않을 만큼 편안하게 운전해준다.

라디오도 낮게 틀어놓거나 아예 꺼놓았다. 그럴 때는 서울에서 제일 행복한 승객이 된 기분이다. 그래, 인생도 이런 게 아니겠어? 날이면 날마다 흐리기만 한 건 아니지. 가끔씩 쨍하고 해뜰 날도 있는 거지.

참, 그런데 그 언니들 다 어디 갔지? 왜 옛날 우리 학교 다닐 때 쉰 목소리로 '오라이!'를 외치던 차장 언니들 말이야. 그 언니들이 쾅하고 몸체를 두드려야 버스가 출발했지. 정말 힘있고 멋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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