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고 전옥주씨 이모 명승희 (사)대한무궁화중앙회 총재

5·18 민주화운동 당시 대치하는 시민과 계엄군 사이에서 가두방송하는 전옥주씨의 뒷 모습.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2018년 공개한 영상 캡처
5·18 민주화운동 당시 대치하는 시민과 계엄군 사이에서 가두방송하는 전옥주씨의 뒷 모습.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2018년 공개한 영상 캡처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 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도청으로 나오세요.” 

흐느끼듯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5월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광주 도심을 파고 들었다. 가두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광주 시내를 돌며 가두방송을 한 젊은 여성을 광주시민이라면 기억한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의 실제 인물로 5․18민주화운동 당시 가두방송을 맡아 시민들의 참여를 이끈 전옥주씨가 지난 16일 7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전옥주씨의 이모인 명승희(83·(사)대한무궁화중앙회 총재)씨는 18일 여성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고인이 된 조카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쳤다.   

“옥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고생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왼쪽부터)고 전옥주씨와 이모 명승희씨. 사진=명승희씨 제공
(왼쪽부터)고 전옥주씨와 이모 명승희씨. 사진=명승희씨 제공

외가에서 자란 전씨에게 이모인 명씨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만큼 이모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명씨는 “옥주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똑똑하고 야물었다. 말을 잘해 칭찬도 많이 받고 무용도 곧잘 해서 주위 사람들의 귀여움도 독차지했다”고 했다. 전옥주라는 이름도 전씨가 본명(전춘심)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명씨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전남 보성이 집이었던 전씨는 무용학원을 운영하기 위해 광주에 왔다가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분노해 항쟁에 뛰어 들었다. 

“옥주가 무용학원을 해보기 위해 광주에 갔다가 시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수가 없어 마이크를 잡았고 트럭을 타고 광주 곳곳을 돌며 시민의 항쟁 참여와 헌혈을 호소했다고 하더라고요.”

80년 5월 당시 전씨의 용기는 시민 봉기를 이끄는 기폭제가 됐고,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시민들을 하나로 응집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전씨는 최후 진압 작전 직후 간첩으로 몰렸고, 계엄군에 끌려가 모진 고문과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결국 그는 포고령 위반과 소요 사태 등의 죄목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아 투옥됐고, 이듬해인 1981년 4월 사면됐다. 하지만 그를 평생 따라다닌 것은 심한 고문 후유증이었다. 밤낮 없이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온몸은 점점 피폐해져갔다.  

“80년 5월 당시 시민군으로 위장한 계엄군에게 우리 옥주가 납치 됐고, 총대로 두들겨 맞아서 6개월 동안 출혈이 있었고 뇌손상까지 입어 매우 힘든 상태였어요.”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2묘역에서 전옥주(전춘심)씨 유해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전씨는 5·18 당시 시민 참여를 호소하는 가두 방송으로 항쟁을 이끌었다. ⓒ여성신문·뉴시스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 2묘역에서 전옥주(전춘심)씨 유해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전씨는 5·18 당시 시민 참여를 호소하는 가두 방송으로 항쟁을 이끌었다. ⓒ여성신문·뉴시스

명씨는 조카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내 조카지만 여성으로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참으로 장하고 자랑스럽네요. 슬프지만 옥주의 죽음이 5.18의 진실을 밝히는 밀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씨는 19일 추모객들의 애도 속에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돼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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