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권력형 성폭력 문제를 세상에 고발한 김지은 작가가 일상의 이야기로 찾아왔습니다. 성폭력 고발 이후 투쟁기를 담은『김지은입니다』 출간 이후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담히 써내려갈 예정입니다. 또 다른 피해자를 향한 용기와 연대의 메시지도 함께 전합니다. 칼럼은 매달 넷째 주 여성신문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편집자 주> 

일러스트=원혜정
일러스트=원혜정

세상은 정의롭지 않다. 위선과 거짓 앞에 진실은 속수무책이다. 살을 에는 고통 속에서 사실을 밝혀달라 호소하는 피해자의 목소리는 ‘피해호소인’이라는 이상한 단어로 폄하됐다. 인권과 상식은 더 이상 약자의 삶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가 아니라 강자들의 흔한 레토릭이 되었다. 표와 바꾸는 연설문의 한낱 단어로 전락했다. 

진실이 밝혀졌지만…
고발은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선택지였다. 죽음이 오히려 쉬운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고발 이후 2년 가까이를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재판을 받으며 지냈다.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힘겨웠던 기억을 하나하나 검증 받았고, 유명 로펌 출신과 전관 변호사들로 꾸려진 안희정의 법률인단과 맞서 싸웠다. 법정과 병원을 오고 가는 단조로운 일상조차 너무나 버거웠지만,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는 마지막 의지만은 지켜내고 싶었다. 다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법원에서 진실은 밝혀졌고, 가해자는 감옥에 갔다.

그러나 안희정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 법원의 판결은 한낱 음모론의 결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악의적으로 편집한 문자와 상상력을 동원한 허위 주장으로 인민재판을 열었다.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권위로, 자신들만의 또 다른 판결을 내렸다. 그들의 상상력 속에서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었다. 맨 얼굴의 진실은 화려하게 치장한 음모론 앞에 힘을 잃었다. 대중은 믿었고, 나는 또 다른 감옥에 갇혔다. 그 과정 속에서 누군가는 자신들의 권력과 카르텔을 더욱 공고히 했다. 안희정의 이름으로 정치를 하던 사람들은 힘 있는 국회의원으로, 2차 가해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국회로 들어가 승진을 거듭했다. 법정에서 위증한 사람은 공공기관의 수장이 되었고, 2차 가해로 벌금형을 받은 사람은 최근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그들에게는 진실보다 음모론으로 치장된 거짓이 필요했다. 그것이 곧 자신들을 지켜줄 마지막 방패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사이 어렵게 사실을 증언해 줬던 증인들은 공직을 그만두거나, 우리나라를 떠났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유
고발로 진실을 밝혀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다. 일상은 사라졌고, 이제는 그 진실마저 음모론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짓밟히고 있다. 나라의 힘 있는 권력자들은 모른 척 용인했다. 공개적으로 가해자를 위로하고, 2차 가해를 한 사람들을 공직에 임명했으며, 진실을 증언해 준 조력자를 해고했다. 어디에도 정의는 없었다.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권력형 성폭력은 사회 곳곳에서 계속되었고, 고통은 오롯이 피해자의 몫이 되었다. 진정한 사과와 반성만 있었다면 반복되지 않아도 됐을 일들이다. 

정의까지는 감히 꿈꾸지 않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진심으로 죗값을 치르고, 고통을 받는 피해자가 더 이상은 없도록 이 싸움을 이어갈 뿐이다. 어딘가에서 이 글을 읽고 계실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포기하지 말자고. 세상은 저 연단 위의 사람들이 아니라 홀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당신이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상은 정의롭지 않지만, 당신은 옳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