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핑크 & 블루 프로젝트’ 윤정미 사진작가
‘분홍은 여자, 파랑은 남자’ 편견 넘어
자신만의 색 찾는 과정 포착
여성·엄마·아내·한국인...여러 정체성 사이
부딪히고 흔들리며 작품 선보여

아이들은 자라고, 아이들의 삶과 공간을 채운 색도 바뀐다. 2005년부터 윤정미 작가가 작업해온 연작 ‘핑크 & 블루 프로젝트 (The Pink & Blue Project)’. 현호 군을 모델로 2009, 2014년 각각 촬영한 연작. ⓒ윤정미 작가
분홍 혹은 파랑. 그러나 아이들은 자라고, 아이들의 삶과 공간을 채운 색도 바뀐다. 2005년부터 윤정미 작가가 작업해온 연작 ‘핑크 & 블루 프로젝트 (The Pink & Blue Project)’. 현호 군을 모델로 2009, 2014년 각각 촬영한 연작. ⓒ윤정미 작가
윤정미 사진작가 ⓒ홍수형 기자
윤정미 사진작가가 2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작업실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홍수형 기자

온통 분홍색 물건에 둘러싸인 여자아이들, 파란색에 휩싸인 남자아이들.... ‘분홍은 여자, 파랑은 남자’ 이분법을 선명하게 포착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윤정미 사진작가의 ‘핑크 & 블루 프로젝트’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라이프지 폐간호 바로 전호에 표지로 실렸다. 윤정미라는 이름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작품이다. 요즘도 2주에 한 번씩 각국에서 전시나 자료 이용 문의가 들어온다. 

“제겐 너무나 영광이죠. 이렇게까지 잘 될 줄은 몰랐어요(웃음). 제 딸이 없었으면 이 작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윤 작가는 2004년 미국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chool of Visual Arts)’ 유학 시절 우연히 이 작업을 시작했다. 분홍색만 고집하던 딸을 보다가, 문득 다른 아이들을 보니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여자아이들은 죄다 핑크 일색”이었다. 분홍색 물건을 모두 꺼내 늘어놓고 사진을 찍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시작했다. 딸과 딸의 친구들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모델을 섭외해서 사진을 찍었다. 집에 있는 색색의 물건을 모두 꺼내서 4~5시간 동안 재배열해 촬영했다.

5년, 10년 뒤 다시 모델들을 찾아갔다. 아이들은 자라고, 장난감 대신 게임팩과 아이돌의 브로마이드가 생겼다. 색도 따라서 바뀌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을 모아 보니 젠더와 색의 관계, 지나친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 획일화된 소비 등 다양한 사회적 함의를 던지는 결과물이 탄생했다. ‘그땐 그랬지’ 같은 추억을 되새기는 즐거움도 선사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 해석이 가능한 사진이다. 윤 작가는 그게 이 프로젝트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자라고, 아이들의 삶과 공간을 채운 색도 바뀐다. 2005년부터 윤정미 작가가 작업해온 연작 ‘핑크 & 블루 프로젝트 (The Pink & Blue Project)’. 딸 서우양을 모델로 2005, 2007, 2009년 각각 촬영한 연작.  ⓒ윤정미 작가
아이들은 자라고, 아이들의 삶과 공간을 채운 색도 바뀐다. 2005년부터 윤정미 작가가 작업해온 연작 ‘핑크 & 블루 프로젝트 (The Pink & Blue Project)’. 딸 서우양을 모델로 2005, 2007, 2009년 각각 촬영한 연작. ⓒ윤정미 작가
윤정미 작가의 모델 중 상유 씨의 선호 색상 변천사. 상유 씨는 2006년 어린 시절엔 분홍색을 좋아했으나, 2009년엔 분홍색이 유치해서 싫다며 파란색을 선호한다고 했다. 2015년엔 뚜렷한 선호색이 없었다. (왼쪽부터) 상유와 상유의 핑크색 물건들, 뉴저지,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2006 / 상유와 상유의 파란색 물건들, 뉴저지,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2009 / 기숙사 방 안의 상유, 뉴욕, 미국, 라이트젯 프린트, 2015. ⓒ윤정미 작가
윤정미 작가의 모델 중 상유 씨의 선호 색상 변천사. 상유 씨는 2006년 어린 시절엔 분홍색을 좋아했으나, 2009년엔 분홍색이 유치해서 싫다며 파란색을 선호한다고 했다. 2015년엔 뚜렷한 선호색이 없었다. ⓒ윤정미 작가

윤 작가는 2021년 현재도 ‘핑크 & 블루 프로젝트’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2019년에는 서울 카이스트 리서치 앤 아트 갤러리에서 ‘핑크 블루 관찰(Pink and Blue Observation)’전을 열었다. 여성학, 뷰티, 육아 등 ‘여성’ 관련 도서 표지가 대체로 분홍 일색인 점에 주목해 책을 모아놓고 찍은 사진 등,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서 성별 고정관념을 드러내는 작업을 선보였다.

윤정미 작가의 2019년작 'Pink Books' 중 '서울책문고_핑크색 책들' ⓒ윤정미 작가
윤정미 작가의 2019년작 'Pink Books' 중 '서울책문고_핑크색 책들'. ‘여성’ 관련 도서 표지가 대체로 분홍 일색인 점에 주목했다. ⓒ윤정미 작가
그림책 『안녕? 나의 핑크 블루』(우리학교) ⓒ우리학교
그림책 『안녕? 나의 핑크 블루』(우리학교) ⓒ우리학교

최근 그림책으로도 변신했다. 『안녕? 나의 핑크 블루』(우리학교)는 젠더와 색, 상품화에 대한 교육적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책이다. 그래도 딱딱하거나 무겁지는 않다. 글을 쓴 소이언 작가는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친절하게 이야기를 건넨다. “어른들은 색에 이름을 붙인 다음 마음대로 편을 나누었어요. 하지만 색은 누가, 언제 보느냐에 따라 달라요. (...) 정해진 색을 벗어나고 골라 준 색을 버리면서 우리는 계속 자랄 거예요.”

여성·엄마·아내·한국인...다양한 정체성 사이
부딪히고 흔들리며 내놓은 작품들

윤정미 사진작가 ⓒ홍수형 기자
윤정미 사진작가 ⓒ홍수형 기자

윤 작가는 2019년부터 홍대 산업미술대학원 사진디자인 전공 교수로 강의 중이다. 그간 ‘핑크 & 블루 프로젝트’, ‘공간-사람-공간’, ‘사람-공간-관계’, ‘반려동물’, ‘It Will Be a Better Day_근대소설’ 등 다채로운 전시회를 열었다. 2018년 일우사진상, 2012년 홍콩의 소버린 예술재단 아시아 작가상, 2006년 다음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필라델피아미술관, 보스턴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수많은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부터 사진가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본래 서양화를 전공했다. 결혼·임신 후 진로를 여러 번 바꿨다. 대학 졸업 후 판화를 하려 했는데, 임신한 몸으론 독성이 강한 화학약품 작업을 할 수가 없었다. 이어진 출산, 육아, 시집살이 속에서 돌파구를 찾다가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사진 작업을 시작한 건 1996년이다. 

돌아보면 젠더에 주목한 작업을 여럿 해왔다. 미국 유학 시절엔 자신의 얼굴에 ‘여성(woman)’ ‘엄마(mother)’ ‘아내(wife)’ ‘한국인(Korean)’ ‘딸(daughter)’ ‘며느리(daughter in law)’ ‘견디다(endure)’라는 단어를 빨간 립스틱으로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퍼포먼스를 사진과 영상으로 제작했다(‘Red Face’). ‘핑크&블루 프로젝트’도 아이들의 성별에 따른 공통점을 놓치지 않고 담은 작품이었다. 

여성 작가라서, 페미니스트라서가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 사이에서 부딪히고 흔들리면서, 삶에서 우러나온 작업을 하다 보니 작품에도 투영됐다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임신했을 때에도 일을 쉬어본 적 없다”고 했다. 사진작가이자 아시아 여성, 아내, 며느리,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회적 역할을 바쁘게 수행하며 무게중심을 잡으려 노력해왔다.

“일하면서 육아도 해야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생활 속 페미니즘’이 있잖아요. 배우지 않아도 아는 그런 걸 표현하다 보니 국경, 세대, 문화를 넘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산 것 같아요. 페미니즘과 젠더가 여전히 사회적 이슈일 정도로 여성의 현실이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게 안타깝죠.”

윤정미 작가의 2004년 작품 'Red Face' ⓒ윤정미 작가
윤정미 작가의 2004년 작품 'Red Face' ⓒ윤정미 작가

그는 최근 패션지 ‘보그’ 3월호에 신작을 게재했다. 파킨슨병과 싸우고 있는 모친을 기억하며, 어릴 적 모친이 입혀준 고운 분홍색 드레스를 들고 옛것이 사라져가는 을지로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한영수 작가의 사진집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오는 8월에는 서울 은평구 ‘스페이스 55’ 갤러리에서 2인전을 열 계획이다.

그는 “요즘은 나이듦, 돌봄, 죽음, 부재 같은 주제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을지로, 종로 등지를 돌며 사라지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며 “50대가 되니 건강한 몸으로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아주 많이 남지 않은 것 같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고, 내 작업을 하는 시간을 더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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