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서울광장에서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열려 참가자들이 다양한 무지개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9년 6월1일 서울광장에서 제20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열려 참가자들이 다양한 무지개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성소수자의 존재와 죽음, 말의 한계를 직면하는 시간들

“지난 한 달여 사이, 세 명의 트랜스젠더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이 문장은 정확한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일 수 있다. 그 사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트랜스젠더들이 언제, 어떻게 스스로 이 세상을 떠났을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문장은 이들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는 문장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였다는 사실이 마치 그 자체로 죽음의 이유인 양 여겨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죽음을 추모했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어리석은 말들이 떠다녔다. 개중에는 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트랜스젠더의 죽음을 가지고 호들갑이냐고 하거나, 죽어가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째서 트랜스젠더의 죽음을 이토록 안타까워하냐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당신들은 남자였을 뿐 여자가 아니다”라고 했고, 누군가는 “다음 생에는 꼭 아름다운 여성으로 태어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모든 말들은 또다시 떠난 이들을 이분법의 세계에 가두고 있었다.

이분법의 세계에 갇히는 말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둘 중 하나의 모습과 규범에 끼워 맞춰야 하는 세상에서 트랜스젠더는 먼저의 성별에서 이미 떠났으나 다른 성별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혹은 떠나올 수도 없고 도달할 수 없는 길을 굳이 어긋나 살아가는 존재들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들이 떠나온 곳은 어디이며, 도착할 곳은 과연 어디일까. 우리는 성별이라는 것을 특정한 모습으로 고정된 하나의 장소처럼 여기고 트랜스젠더의 삶을 ‘다른 곳’에 도착하기 위한 여정으로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 중 누구도 같은 자신이 태어났던 출발지 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장소라고 여기고 있는 그곳, 그 길은 사실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우리에게 끊임없이 길들여지기를 요구하는 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곁을 떠난 세 명의 트랜스젠더가 살아왔던 여정은 하나의 고정된 장소에 도착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라 오히려 주어진 길을 바꿔 보고자 했던 아주 적극적인 여행이었다. 그들은 세상이 그리는 ‘아름다운 여성’ 혹은 ‘멋진 남성’ 같은 지루한 이분법의 도착지가 아닌 자신에게 맞는 삶의 도착지를 각자의 모습으로 찾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들의 여정을 멈추게 만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우리는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의 여행길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고정된 단 두 가지 삶의 경로 외에는 결코 다른 여정을 허용하려 하지 않았던 견고한 이 사회가 그들에게 무엇을 포기하게 했고, 어떻게 그들의 삶을 가로막았는지를 말이다. 세상은 단지 서류 위의 숫자들을 이유로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특정한 공간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았다. 그 험난한 여정 위에서 그들은 길들여진 이분법 밖의 ‘트랜스젠더’인 동시에 작가이고, 교사이고, 군인이었으며, 주어진 길을 벗어난 가난한 시민이자, 해고된 노동자였다.

가난이나 부당해고가 부정의에서 비롯되는 일임을 알고 있다면, 성별이분법 또한 그 부정의의 일면이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성별에 따라 요구되는 규범과 의무가 여성들에게 더 많은 차별과 불평등을 야기하는 조건임을 이해한다면, 이미 주어진 길을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내 여정의 곁에 수많은 트랜스젠더 여행자들이 있음을 발견하기 바란다.

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서울퀴어퍼레이드에는 불볕 더위에도 6만명(주최측 추산)이 모였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8년 7월14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서울퀴어퍼레이드. 불볕 더위에도 6만명(주최측 추산)이 모였다. ⓒ여성신문

“죽지 말자”가 아닌 “살아내자”는 인사를 건네며

그들이 떠나간 시간 동안 선거에 나선 정치인들은 저마다 성소수자의 존재를 지우기에 바빴다. ‘성소수자를 안 볼 권리’가 있으니 퀴어문화축제는 도심 외곽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던 안철수도, 과거 전광훈 목사가 주관했던 기도회에 나가 “차별금지법, 동성애법, 인권관련법, 다 반대한다”고 말했던 박영선도 스스로 차별을 천명했다. 살아있는 이들의 존재를 지우고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우면 된다는 이들의 생각은 오랜 인종주의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성소수자들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차별의 자리에 의도적으로 소환되고 있다. 세간의 이목을 끌고 보수 종교계의 표심을 잡기 위해 성소수자는 그저 타자화된 대상으로서 호명되고 여론몰이에 이용된다. 마치 퀴어문화축제나 동성 간의 성관계만이 성소수자라는 존재의 전부라도 되는 듯, 반복되는 찬반의 질문 속에서 이 사회는 성소수자들이 다른 구성원들과 같이 밥을 먹고, 공부하고, 일하고, 살 곳을 구하고, 돌봄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지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죽지 말자”가 아니라 “살아내자”, “살아가자”고 이야기한다. 성소수자의 죽음을 다시금 협소한 몇 개의 언어나 추상적인 말들 속에 가두지 않도록, 죽은 이들의 삶이 ‘지금 여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에 연결돼 있음을 기억하도록 말이다. 학교와 일터, 병원, 광장, 모든 곳에서 그 삶을 연결하는 적극적인 애도의 정치를 우리는 살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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