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보통날] ②

2018년 3월 권력형 성폭력 문제를 세상에 고발한 김지은 작가가 일상의 이야기로 찾아왔습니다. 성폭력 고발 이후 투쟁기를 담은『김지은입니다』 출간 이후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담히 써내려갈 예정입니다. 또 다른 피해자를 향한 용기와 연대의 메시지도 함께 전합니다. 칼럼은 매달 넷째 주 여성신문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편집자 주> 

일러스트: 호핑그린 작가
노동권을 존중받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조차 무시당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며 살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 노동은 개인의 존엄 그 자체다. ⓒ호핑그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문학을 전공하고, 사무직을 주로 해왔던 내게 기술을 배우는 모든 행위는 낯설었다. 기계를 다뤄 결과물을 만드는 일은 경이롭지만, 어려웠다. 노동자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며 매일 배움터에 나간다. 내게 노동은 곧 삶이고, 미래다.

3년 전 미투를 한 이유도 온전한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노동자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존중받고, 동료를 보호하고 싶었다. 싸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싸우고를 반복하며 사법기관의 상식적인 결과를 받아냈다. 역설적이게도 승리 뒤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노동자로서의 삶을 지키고 싶어 시작한 싸움 때문에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미투 직후 충남도청이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는 발표를 언론에 하던 날 나는 도청으로부터 아무런 보호 조치도 받지 못한 채 면직 통보를 받았다. 전현직 일부 도청 공무원들로부터 혐오와 비난을 받았으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공개적인 지지 발언을 이어갔다. 이후 가해자 측에 섰던 수많은 측근들은 속속 공직에 복귀하거나 영전했다. 최근 현직 충남지사가 대권을 준비하며 교도소에 있는 안희정과의 면회를 타진하고 있다는 기사도 보았다. 공공의 영역에서조차 같은 노동자에 대한 연대와 존중은 찾을 수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친소 관계와 이해관계에 매달리고 있다.

얼마 전 고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보며 다시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노동자로서 평범한 삶을 이어가고 싶다는 절규가, 군인으로서 국가를 지키고 싶다는 이타심이 그렇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노동권을 존중받고 싶다는 기본적인 요구조차 무시당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요구하며 살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 노동은 개인의 존엄 그 자체다.

노동자의 꿈을 대변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많은 분들이 연일 TV에 나온다. 성범죄 가해자를 찾아가 공개적으로 위로하고, 진실을 말한 사람들을 해고했으며, 2차 가해에 앞장선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임용한 그 사람들이다. 노동의 무게가 다르지 않을 텐데 성폭력 범죄자와 2차 가해자들은 너무나 쉽게 노동을 이어간다. 진심 어린 사과와 행동하는 반성 대신 오직 말뿐인 면피로 생계를 이어간다. 세상이 바뀌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다시 노동자로서의 삶을 꿈꿔도 되는 걸까?

기술을 배우며 하루에도 여러 번씩 내가 왜 이 어려운 걸 배우고 있어야 하나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위협과 방해 없이 다시 노동자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기술을 배우고 온 오늘도 끝없이 지치지만, 내일을 향한 희망으로 순간을 살아간다. 모자와 마스크로 동여매고 기술을 배우는 내게 오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지은씨는 내 수제자야!’ 좋은 기술자가 되어 다시 평범한 노동자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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