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가정폭력 생존자 예술치유 프로그램
‘마음대로, 점프!’ 참가자 가이아·이루리·조이
작년 첫 단독 공연...자작곡·창작무용 선보여
노래하고 춤추며 무기력·우울 이겨내고
다른 생존자들 만나 용기 얻어
‘엄벌보다 가정 보호’ 우선하는 법제도 바꿔야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뿅뿅대는 일렉트로닉 음악에 맞춰 맨발의 여자들이 춤춘다. 빙글빙글 돌다가 가운데 쌓인 로프 위로 하나씩 뛰어든다. 엉덩방아를 찧어도 벌떡 일어나 또 춤춘다. 아이처럼 웃는다. 손을 마주 잡고, 어깨를 토닥이고 얼싸안는다.

9인의 무용수는 모두 가정폭력 생존자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9년부터 진행해온 가정폭력 생존자 예술치유 프로그램 참가자들이다. 지난해 11월 말 ‘마음대로, 점프!’라는 이름으로 자작곡 앨범을 내고 창작무용 공연도 열었다. 코로나19 속에서 열린 첫 단독공연은 다른 생존자들과 가족, 애인, 친구들의 박수 속에서 막을 내렸다. 무대에 올랐던 가이아, 이루리, 조이를 지난 8일 만났다.

“우리 정말 열심히 쏟아부었지. 예술이 따로 없더라.”(조이)

“그날 공연장이 눈물바다였잖아요. 이런 생존자들의 합동 공연이 우리나라에서 가능하구나. 우리 만남이 운명 같아요.”(가이아)

“2019년 첫 공연 땐 제 얘기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스킨십도 어려웠어요. 이번엔 몸과 마음이 더 활짝 열렸어요. 너무 좋았어요.”(이루리)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믿고 사랑했던 사람에게 폭력을 겪은 여자들. 공통점은 그뿐이었다. 나이도 관심사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연습실에 모였다. 각자의 경험을 꺼내고 얽힌 감정을 춤과 노래로 표현했다. 틈틈이 모여 같이 밥 먹고 차 마시다 보니 20대와 50대가 친구가 됐다. 아픈 기억을 외면하기보다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며 찬찬히 돌아보고, 인간관계와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50대 조이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와 쉼터에서 지내다가 ‘점프’에 참여했다. 처음엔 사람들 앞에서 몸을 움직일 용기가 없었다. “돈도 자신감도 바닥이었죠. 스무 해 동안 나를 죽이고 살았으니까. 원래 참 역동적이었는데 가해자에게 ‘넌 소심하고 쓸모가 없다’는 말을 계속 들었더니 초라해졌죠. 무대에 선 저를 본 애들이 ‘엄마 참 멋있다’고 해서 살맛이 났어요.”

취직에도 성공했다. “7개월짼데 실력 발휘를 했더니 이젠 사장이 동업하자고 하네요(일동 박수). ‘점프’를 하며 자신감을 얻은 덕이야. 하하. 노래하고 춤추다 보니 잊고 살았던 내 본질이 보여요. 가끔은 혼자서 막 춤을 춰요.”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하는 ‘마음대로, 점프!’에 참여한 조이 ⓒ여성신문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하는 ‘마음대로, 점프!’에 참여한 조이 ⓒ여성신문

30대 이루리는 결혼생활 1년 반 동안 남편에게 잦은 폭력을 당했다. 한국여성의전화의 도움으로 안전한 곳에 머물며 이혼 준비를 했다. 일하고 아이 키우면서 이혼·양육비 소송까지 하려니 힘에 부쳤다. 그러던 중 ‘점프’에 합류했고 2년 연속 무대에 섰다.

“저는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던 평범한 여자였어요. 가해자에 맞서면서 가정폭력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만연한지, 양육비를 제대로 못 받는 한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깨닫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힘든 시기에 ‘점프’는 제 힘의 원천이었어요. 내 사연을 알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무서웠는데 여기 오면 다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었어요.”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하는 ‘마음대로, 점프!’에 참여한 이루리 ⓒ여성신문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하는 ‘마음대로, 점프!’에 참여한 이루리 ⓒ여성신문

20대 가이아는 음악 활동, 청년들의 고민 상담 등을 하며 산다. 서울청년센터에서 ‘속마음반상회’라는 청년 공동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지금은 아버지를 돌보며 산다. 독립해 연락을 끊고 살다가 몇 해 전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의 조현병 병력도 그제야 알았다. 미움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우연히 ‘점프’를 접했다. 

“10대 때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했는데, 이젠 아버지의 보호자가 됐어요. 제 상처가 가장 깊다고 생각했는데 ‘점프’에서 다른 생존자들을 만나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졌어요. 여기선 50대도, 허리디스크가 있는 사람도 춤을 춰요. 나라고 못 할 건 뭐야? 제 경험을 책으로 쓸 수도 있겠다 싶어요. 큰 용기를 얻었죠.”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하는 ‘마음대로, 점프!’에 참여한 가이아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하는 ‘마음대로, 점프!’에 참여한 가이아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이들은 “용감하다”, “멋지다”, “정말 잘 자랐구나” 같은 말을 들으면 힘이 난다고 했다.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 같아요. 자신감도 생기고요.”(가이아) “비슷한 사연을 지닌 분들이 저를 보고 용기 내 세상에 나오고, 목소리를 낼 때 힘이 나요.”(이루리)

반대로 “네가 (가해자와 함께 살기를) 선택했잖아”, “왜 가만히 있냐. 나라면 그렇게 안 산다”, “증거 있냐” 같이 가정폭력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말들은 상처가 됐다. 피해자의 자아존중감 저하, 우울감을 부르는 게 가정폭력이다. 많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사랑하면 달라질 거라는 믿음, 자신이 벗어나도 자식이나 다른 가족이 폭력에 노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경제적 자립의 어려움 등으로 가해자를 떠나지 못한다.

‘가정폭력은 정말 흔하지만, 피해자들이 그 사실을 인정하거나 드러내길 꺼려서 실태를 파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생존자들은 말한다. 2020년 남편·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97명이다(한국여성의전화).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가정폭력도 늘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20년 실시한 상담 3만9363건 중 초기상담 1143건을 분석해보니 가정폭력 상담이 41.6%(475건)이었다. 그해 1월 26%에서 코로나19 유행이 본격화된 2월부터 40%대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2020년 가정폭력 가해자 구속 기소율은 0.8%에 그쳤다. 형사처벌을 내려야 할 강력범죄인데도, ‘가정’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엄벌보다는 ‘가정 보호’에 초점을 두는 게 현실이다.

법제도의 변화가 더딜수록 피해자들은 고립된다. 생존자들은 ‘가정 문제이니 두 분이 잘 해결하시라’는 경찰의 시큰둥한 말을, 가출했다가도 두고 온 가족들이 어른거려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생계가 급해 지친 몸과 마음을 충분히 돌보기 어려운 현실을 이야기했다. “누구도 나를 돕지 않는구나, 나 혼자라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피해자가 얼마나 많은데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이런 문제를 물려주면 안 되잖아요.”(이루리)

세 생존자가 올해도 ‘마음대로, 점프!’ 활동을 이어나가려는 이유다. 올 상반기에는 전국 5~6개 지역을 돌며 공연과 워크샵을 열기로 했다. 폭력과 절망에 지지 않고 잘살아 보겠다는 여성들의 다음 무대가 기대된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