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엔 없다, 달릴 자유 위해 싸운 여성들의 역사
교과서엔 없다, 달릴 자유 위해 싸운 여성들의 역사
  • 문경란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
  • 승인 2021.05.12 09:24
  • 수정 2021-05-19 16: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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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여성 주자들의 분투로 얻은
‘여성의 달릴 자유’

제21회 여성마라톤 대회 개막
각자 뛰고 걷지만 랜선으로 연결하며
코로나 시대 우울과 고립 떨치자
캐서린 스위처는 1967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성 최초로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캐서린 스위처 공식 웹사이트 / AP Images
캐서린 스위처는 1967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성 최초로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캐서린 스위처 공식 웹사이트 / AP Images

제1회 근대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가 개최됐던 1896년 3월 29일 아테네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 우승자인 농부 출신 스피리돈 루이스가 3시간이 채 안 되는 기록으로 경기장 트랙에서 마지막 한 바퀴를 돌았다. 완주 테이프를 끊은 이후에도 한동안 그칠 줄 모르는 관중들의 뜨거운 함성.

이보다 1시간가량 뒤늦은 시각. 한 여성 마라토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경기장 주변을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위해 박수를 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 코스를 위해 경기장으로 들어서려다 완강하게 저지당한 그녀의 이름은 멜포메네. 근대 올림픽 마라톤에 참석한 최초의 여성 마라토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다른 남자 마라토너 17명의 공식 참가자 명단과 나란히 기록되지 못했다. 그녀가 레이스 중간에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오렌지를 빨아 먹으려고” 잠시 멈췄다는 기록만이 한 신문 기사 속에 남아있을 뿐. ‘비극의 여신’이란 뜻의 그녀 이름이 암시하는 것일까. 1960년대 이전까지, 여성 마라톤 선수들의 존재는 역사 속에서 배제되고 지워졌다.

여성 마라톤의 역사 ⓒ여성신문
여성 마라톤의 역사 ⓒ여성신문

조롱과 비난 무릅쓰고
장거리 달리기 도전한 여성들

과연 여성은 달리지 않았을까? 인류의 기록된 역사가 대체로 권력자 중심의 남성들 이야기(his-story)이듯, 여성은 달리지 않아서 기록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아서 달리지 않은 것으로 오해될 뿐이다. 아니, 여자들의 장거리 달리기는 온통 조롱과 비난거리여서 역사에 기록될 가치를 갖지 못했다.

1837년, 여성을 위한 사실상의 최초의 운동설명서를 쓴 도널드 워커라는 영국 남자는 “달리기와 제자리 뛰기는 과도한 충격을 주기 때문에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썼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썼던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는 “여성이 품위를 잃는 유일한 행동이 달리기”라고 했다.

굳이 유명 인사들의 케케묵은 말들을 상기할 필요까지도 없다. 동서를 막론하고 여아들이 자랄 때 수도 없이 들었을 “여자답게” “조신하게” 류의 엄격한 통제적 사회규범을 떠올리면 왜 여성의 달리기가 껄끄럽게 생각됐는지, 여성이 갈 수 있는 곳이 엄격히 제한됐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여자답게 던지기』라는 책에서 “스포츠를 하는 많은 여성들에게 공간은 상상하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이동만 허용되는 제한된 공간을 의미한다”고 했다.

제19회 여성마라톤대회가 4일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공원 평화광장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주로를 달리고 있다. ⓒ여성신문
2019년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공원 평화광장에서 열린 제19회 여성마라톤대회 현장. 올해 21회 여성마라톤대회는 랜선 개최된다. ⓒ여성신문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여성 주자들의 분투로 얻은
‘여성의 달릴 자유’

그럼에도 여자들은 달렸다. 이유가 있겠는가? 달리고 싶어서 달렸을 뿐. 『본투런(Born To Run)』이라는 책을 쓴 AP통신의 크리스토퍼 맥두걸은 “인간은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설파했다. 그는 책에서 진화생물학자의 실험과 이론을 깊이 다루는데, 결국 인류가 오래 달리는 데 적합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호흡과 정신과 근육은 드넓은 지역을 유연하게 달리는데 최적화되도록 단련됐다.

탄력 있는 다리, 섬세한 몸통, 땀샘, 털 없는 피부, 햇볕을 덜 받을 수 있는 수직 몸체 등은 인간이 최고의 장거리 주자로 진화하기 위해 생겨난 특징이며, 이 특징으로 인해 생존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달리기를 통해 인류 역사를 더듬어낸 맥두걸은 이렇게 말했다. “달리기가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 초능력이며 모든 인간에게는 이 같은 초능력이 있다”고.

달리기가 인류 진화의 시원과 연결돼 있다면 여성도 당연히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이 달리는 본능을 사회적으로 표출할 수 있기까지는 수많은 용감하고 도전적인 여성 주자들을 필요로 했다.

서구의 스포츠역사학자들이 치밀한 탐구를 통해 발굴해 낸 ‘기억되지 않은’ 여성주자들의 사례 몇 가지만 보자. 이미 1820~1830년대. 건강한 여성들은 돈을 벌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를 걷거나 달리는 도보 레이스에 도전했다. 155km 달리기에 도전한 여성도 있고, 65km 달리기에 여러 차례 도전한 여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달리는 동안 야유를 받고 추파에 시달렸다. 1903년에는 재봉사와 모델, 매장 점원 등 파리의 패션업계 종사자 여성 2천5백 명이 한꺼번에 달리는 행사도 있었다. 대중에게 여성의 달리기가 즐거움을 준다는 명분으로 허용됐다고 하는데 참가자들이 잠시라도 느꼈을 일탈의 해방감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국제아마추어선수연맹(IAAF)이 어렵사리 인정한 최초의 여자마라톤 세계 최고 기록의 보유자는 영국 출신의 바이올렛 피어시다. 그녀는 1926년 폴리테크닉 마라톤에서 3시간 45분 만에 완주했지만 기자들이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10년 세월이 지난 뒤 피어시는 남자들과 함께 달린 뒤 4시간 30분의 완주 기록을 인정받았다.

1935년 영국의 여성 마라토너 바이올렛 피어시가 달리는 모습. 피어시는 국제아마추어선수연맹(IAAF)이 인정한 최초의 여자마라톤 세계 최고 기록 보유자다.  ⓒWikipedia
1935년 영국의 여성 마라토너 바이올렛 피어시가 달리는 모습. 피어시는 국제아마추어선수연맹(IAAF)이 인정한 최초의 여자마라톤 세계 최고 기록 보유자다. ⓒWikipedia
1966년 로베르타 깁 빈게이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고 있다.  ⓒGetty Images
1966년 로베르타 깁 빈게이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고 있다. ⓒGetty Images

1960년대는 여성 달리기의 역사에서 전환점의 시기다. 1966년 로베르타 깁 빈게이가, 1년 후 캐서린 스위처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석한다. 대회에 끼어들기 위해 깁은 남자처럼 변복하고 수풀 뒤에 숨어있다 출발해야 했고, 스위처는 참가 신청서에 자신의 이름을 슬쩍 남자 이름처럼 적어 넣었다. 하지만 깁은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기자들에게 ‘발각’돼 공식 참가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마라톤 대회 관리자가 “마라톤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같은 루트를 달렸을 뿐”이라는 실소를 금치 못할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스위처의 달리기는 여성 마라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로 기록될 만하다. 전 세계 신문을 장식했던 그 유명한 사진 덕분이다. 스위처는 등록 코치 및 남자친구와 함께 나란히 달렸다. 하지만 이도 잠시. 대회 마라톤 감독관이 “번호표 내놓고 당장 내 대회에서 썩 꺼져버려!”라고 소리치면서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밀쳤던 것. 하지만 두 명의 남자가 끼어들어 오히려 감독관을 힘차게 밀쳐버렸다. 이 장면이 매스컴을 타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여성들의 달릴 자유는 이처럼 수많은 여성 마라토너들의 분투와 인내와 도전으로 쟁취된 것이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1960년부터 시작된 여성해방운동의 물결이 여성 마라토너들의 등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발언권을 주장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가부장적 통제에 강한 반론을 펴면서 성적 자유와 임신·출산의 자유를 임노동을 할 권리와 함께 주장했다. 남녀가 따로 경기를 펼치는 스포츠의 세계에서 힘과 스피드의 기준은 언제나 남성에 맞춰져 있다.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힘차게’라는 근대 올림픽의 구호는 현대 스포츠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60~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급진적 노력은 세상의 곳곳을 바꾸어놓았고 그 영향은 스포츠의 세계에도 도달했다. 

마라톤 애호가로 유명한 ‘1Q84’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에세이집에서 “달릴 때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하루키는 자신을 오로지 달리는 행위에 딸린 존재로서 위치지우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제21회 여성마라톤 대회 개막
각자 뛰고 걷지만 랜선으로 연결하며
코로나 시대 우울과 고립 떨치자

신체 및 스포츠 활동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 같은 것을 느껴온 여성들에게 달리기는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호주의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마라토너인 카트리나 멘지스 파이크는 “달릴 때면 내 두 발로 지구를 밀어버리는 것 같다”고 했다. 여성들의 달리기는 이제 도전과 용기의 의미보다 자신의 몸을 움직여 즐거움을 얻는 일, 일종의 트렌드가 됐다.

바야흐로 달리기의 계절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잔뜩 위축됐던 몸과 마음을 기지개로 활짝 펴본다. 봄의 끝자락을 느끼게 하는 따끈따끈한 햇살이 들로 산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충동질한다. 산소를 뿜어내는 연녹색의 싱그러운 나뭇잎들은 달려오라고 손짓하는 듯하다.

여성신문이 주최하는 여성마라톤 대회가 올해로 21회를 맞았다. 명칭은 마라톤 대회지만 걷기 종목도 포함된 일종의 가족 축제다. 그동안 무려 25만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나도 수년 전부터 친구 여럿과 함께 대회가 열린 상암동 월드컵 공원 걷기 코스를 따라 걸었다. 온몸에 힘을 빼고 팔을 이리저리 흔들며 걸을 때면 내 몸이 종종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코로나 19의 여파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여성마라톤 대회는 랜선 대회로 열린다. 각자가 뛰고 걷지만 랜선으로 연결하며 코로나 블루의 우울함과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른 고립감을 떨쳐버리면 좋겠다. 마스크 때문에 기록을 내기 어렵다면 차제에 나만의 페이스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힘과 스피드를 최고의 가치로 여겨온 스포츠의 세계에서 경쟁의 가치보다 참여와 관용과 공존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은 스포츠를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다.

스포츠는 자유를 향한 비상한 몸짓이다. 달리고 걸으면서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해방감을 만끽해보자. 튼튼해지는 것은 두 다리만이 아닐 게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내내, 봄바람을 온몸으로 맛보며 두 다리가 허공을 박차 오르는 경험을 음미하는 일은 신나지 않는가.

언론인 출신이자 여성학자인 문경란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서울시 인권위원장, 경찰개혁위원회 인권분과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경찰청 인권위원장, 최숙현 선수 사망사건 공동대책위원회 대표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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