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피해자다움 강요하고 정조 관념에 뿌리 둔 표현
불쾌감, 모욕감 등 다른 표현으로 변경 요구 커져

검찰이 내부 훈령에서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기로 했다. ⓒ여성신문‧뉴시스
검찰이 내부 훈령에서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기로 했다. ⓒ여성신문‧뉴시스

검찰이 ‘성적 수치심’이란 표현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기로 했다. 성평등 관점에서 소관 훈령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검찰 양성평등정책위원회 권고에 따른 것이다.

대검찰청 복지후생과는 소관 훈령인 ‘대검찰청 공무직 등 근로자 관리지침’에 적힌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개정 시행한다고 25일 밝혔다. 

대검찰청 공무직 등 근로자 관리지침 신구조문 비교표. 사진=형사지식공개서비스 캡쳐
대검찰청 공무직 등 근로자 관리지침 신구조문 비교표. 사진=형사지식공개서비스 자료 캡쳐

직장 내 성희롱 조치에 대한 내용을 담은 ‘대검찰청 공무직 등 근로자 관리지침’ 제52조는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근로자가 조사 과정에서 ‘성적 수치심’ 등을 느끼지 아니하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꾼 것이다. 성별 고정관념과 사회적 통념이 반영된 용어를 순화 하기 위한 조치다. 공공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라는 문구를 삭제한 것은 검찰이 처음이다.

검찰 양성평등정책위원회는 지난해 11월 해당 훈령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검찰은 성인지 의식을 높이고 검찰 업무에 성평등 관점을 반영하기 위해 약 270여개의 훈령・예규에 대한 성별영향평가를 실시했다. 양성평등정책위원회는 평가 결과를 보고 44개의 훈령·예 규의 개정을 권고했다.

‘피해자다움’ 강요하는 표현, 수치심

‘수치’의 사전적 의미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법원은 유독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 유무를 판단할 때 ‘성적 수치심’을 느꼈는지 묻는다. 수치심을 느낄 정도는 돼야 성폭력이라고 보는 것이다. 수치심의 정의대로라면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사람은 가해자이지만 오히려 피해자가 느껴야 하는 감정으로 사용되면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법정 용어를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지난 1월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불법촬영(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의 파기환송을 결정하면서 성적 수치심을 ‘부끄러운 감정’만으로 협소하게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2019도16258 사건 요지)

이른바 ‘레깅스 불법촬영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지난 2018년 5월 A씨가 버스에서 레깅스를 입고 있던 피해자의 엉덩이 등 하반신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약 8초간 몰래 영상 촬영 혐의로 기소되면서 시작됐다. 사건의 쟁점은 성폭력처벌법 14조 ‘카메라등이용촬영죄’ 조항에 따라 불법촬영물이 상대의 의사에 반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를 찍은 것인지였다. 1심은 유죄로 판단했지만 2심은 무죄를 선고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항소심은 촬영된 신체 부위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경찰 조사에서 “기분이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진술한 것에 대해 재판부는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표현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피해자의 이 진술이 성적 수치심에 해당한다고 봤다.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이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공포·무기력·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봤다. 더 나아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이 표출된 경우만으로 한정하면 피해자가 느끼는 다양한 피해 감정을 소외시키고, 피해자로 하여금 그러한 감정을 느낄 것을 강요하는 결과가 될 수 있”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짚었다.

성적 수치심 대신 성적 불쾌감, 성적 빡치심으로

한국여성변호사회는 2018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제출한 ‘디지털 성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지원 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상대의 의사에 반하여 신체를 촬영하더라도 현행법상 ‘성적 욕망 또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로 해석되지 않는 경우 범죄 성립 여부가 달라진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하며 범죄의 구성요건으로서 ‘성적 수치심’을 삭제하자고 제안했다.

현재 성폭력처벌법 제14조를 비롯해 ‘아동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아동복지법’ 등에 성적 수치심이라는 규정이 포함돼 있다. 보고서는 “수치심과 연결되는 성폭력은 성폭력 범죄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순결과 정조의 문제로 여겨지고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이어서 성폭력 문제를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통념을 재생산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해야 ‘진짜 피해자’라고 믿는 ‘피해자다움’의 편견이 공고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피해자들이 흔히 갖게 되는 수치심은 가해자들에게나 던져주자. 특히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 경험은 서구 사회보다 더욱 수치심을 갖게 한다. 이제 한국 사회의 시선도 피해자들을 수치심 아래 묶어두지 않았으면 한다. 성폭력은 성의 문제가 아니고, 폭력의 문제니까.”

-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김영서 지음)

최근 성적 수치심을 다른 용어로 변경하자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인천여성회는 성평등 언어 캠페인을 통해 ‘성적수치심’을 ‘성적불쾌감’으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했다. 2014년부터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에 문제를 제기한 한국여성민우회는 최근 ‘성적수치심에 빨강카드를’이라는 주제로 모임을 열고 “부끄러워야 할 사람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를 겪은 피해자에게 성적수치심을 강요하는 세상”에 반격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회에서도 용어 변경을 위한 법 개정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20대 국회에서는 박남춘 의원, 이춘석 의원, 윤소하 의원이 각각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이나 ‘성적 모욕감’, ‘성적 대상으로 하여’ 등으로 바꾸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불쾌감’으로 변경하는 내용의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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