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물 지웠다고 감형? “삭제는 증거인멸이다”
불법촬영물 지웠다고 감형? “삭제는 증거인멸이다”
  • 이하나 기자
  • 승인 2021.07.02 09:14
  • 수정 2021-07-02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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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해 잠든 애인 불법촬영한 A씨
피해자가 발견해 사건 수면 위로
A씨가 제출한 아이폰 ‘복구불가’로
다른 사진, 유포 단서 찾기 어려워
헌법재판소가 몰카를 찍다 벌금형을 받은 소속 헌법연구관을 감싸기 위해 고의로 징계심의 기한을 연장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불법촬영물은 삭제해도 삭제한 게 아니다. 온라인에 한번 유포되면 사실상 완전한 삭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법원은 가해자가 불법촬영물을 삭제‧폐기하는 행위를 ‘감경요소’, 즉 형량을 줄여주는 요인으로 보고 있다. ⓒ여성신문

 

“피고인이 촬영물을 휴대폰에서 삭제했는데
피해자가 삭제함에서 우연히 이 영상을 찾아내 이 사건이 불거졌다.”

서울남부지법(판사 이진웅)이 지난해 11월 준강제추행과 불법촬영(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20대 남성 A씨 재판에서 밝힌 양형 이유다. 사건의 발단을 가해자의 불법촬영이 아니라 피해자의 영상 발견으로 본 것이다. 뒤늦게 판결문을 확인한 피해 여성 B씨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가벼운 처벌도 실망스러웠지만,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듯한 재판부의 태도에 깊은 절망을 느꼈다고 했다.

“범죄는 가해자가 저질렀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 고소한 것이 오히려 양형 이유라는 게 말이 되나요? 성폭력을 당한 건 저인데 왜 가해자 입장에서 형량을 정하나요?”

삭제해도 삭제한 게 아니다

불법촬영물은 삭제해도 삭제한 게 아니다. 온라인에 한번 유포되면 사실상 완전한 삭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법원은 가해자가 불법촬영물을 삭제‧폐기하는 행위를 ‘감경요소’, 즉 형량을 줄여주는 요인으로 보고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양형위)는 지난해 12월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을 정하면서 감경요소로 ‘피해확산 방지를 위한 실질적 조치’를 포함시켰다. △촬영물을 유포되기 전 즉시 삭제하거나 폐기한 경우 △유포된 촬영물을 상당한 비용‧노력을 들여 자발적으로 회수한 경우에는 형량을 줄여줄 수 있도록 했다.

양형기준 확정 직전에 열린 공청회에서는 가해자의 불법촬영물 삭제 행위를 감경요소로 정한 것을 두고 우려가 쏟아졌다. 당시 시민 방청객은 “불법영상물이 배포되면 10년이 지난 후에도 ‘고전명작’이라는 이름으로 공유되는데 성착취물 영상의 완벽한 삭제가 가능하다고 보느냐”고 우려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도 “피해자 지원 사례 중 피고인이 증거인멸을 위해 촬영물을 삭제했는데, 재판부는 유포 전에 삭제한 행위를 긍정적 고려 요인으로 해석한 사건이 있었다”면서 감경사유를 재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들과 여성단체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재판부는 불법촬영물을 유포 전 삭제했다는 점을 양형 이유에 포함한 것이다. 이효린 한사성 사무국장은 “영상 삭제나 폐기는 증거인멸과 구분하기 어려워 이를 감경사유에 포함하는 건 재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2018년 6월 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성차별 수사 중단 촉구 구호를 외치는 모습. ⓒ여성신문‧뉴시스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 2018년 6월 9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성차별 수사 중단 촉구 구호를 외치는 모습. ⓒ여성신문‧뉴시스

 

난 죽도록 힘든데 그의 일상은 그대로

앞선 불법촬영 사건의 피해자 B씨가 피해를 입은 건 지난 2019년 8월이다. 믿었던 남자친구는 B씨가 술에 취해 잠든 틈을 타 신체 중요부위를 강제추행하고 불법촬영했다. 피해 사실을 알게 된 건 20여일이 지난 뒤였다. 우연히 남자친구의 스마트폰을 보던 B씨는 삭제함을 눌렀다가 경악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다잡고 핸드폰으로 그 사진들을 다시 촬영한 뒤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남자친구의 번호를 휴대폰에서 차단했다. ‘단톡방에 뿌린 건 아닐까’ ‘인터넷에 유포했을까’ 전전긍긍하며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A의 아이폰을 압수했으나 이미 ‘복구불가’ 상태였다. 디지털 포렌식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제3자에게 유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자신했다. 또 양형 이유로 “동종 전과와 처벌 전력이 없고 피고인의 연령, 성행, 범행 동기 등을 두루 참작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가해자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풀어줬다. 1심 결과에 낙담해 항소했으나 2심 재판부는 기각했다.

평범했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가해자가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으면 피해 회복을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2년 가까이 흘렀으나 B씨의 삶은 그대로다. 사진을 발견한 2019년 8월 그 날에 머물러 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그는 상담소 지원으로 정신과전문의 상담을 받고 있으나 바닥을 친 B씨의 마음을 더욱 몰아 부친 것은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의 경험이었다.

“처음 조사할 때 여성 경찰이 자신만 볼 수 있는 핸드폰이라며 피해 사진을 보내라고 했어요. 그런데 다른 남성 경찰이 그 전화번호로 제게 전화를 해왔어요. 업무용 공용폰이었던 거죠. 경찰은 제가 해바라기센터 상담을 받은 사실을 알고는 ‘해바라기센터를 어떻게 알고 찾아갔느냐’고도 했어요. 오히려 경찰이 먼저 해바라기센터 존재를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판사는 피해자 탓을 하고, 경찰은 피해자 지원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 속에 B씨의 일상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김현아 변호사는 “증거물 보관관리 체계의 미비 등은 피해자 지원 단계에서 나타나는 고질적인 문제”라며 “성폭력 전담 체제도 필요하지만 전담이 전문이 될 수 있도록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B씨는 민사소송을 준비 중이다. 또 다시 진흙탕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밀려오지만 나락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엄마가 충격을 받을까봐 재판 사실도 알리지 않았어요. 그냥 폭력 사건이면 알렸을 것 같은데, 성폭력이다 보니 알릴 수가 없었어요. 아주 친한 친구를 빼곤 주변에 말하지도 못하고요. 공중화장실은 가지도 못하고 늘 불안합니다. 사람도 잘 믿지 못해요. 저는 죽도록 힘든데 그 사람의 일상은 그대로에요. 이걸 바꾸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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