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범벅이 된 농산물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박효신
흙으로 범벅이 된 농산물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박효신

 

편지 부칠 일이 있어서 우체국엘 들렸다. 연일 30도를 웃도는 찜통 더위. 우체국은 더없이 좋은 피서 장소이다. 에어콘 틀어 보송보송하고 시원한 소파에 앉아 여직원이 빼주는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앉아있자니 카페 기분 제대로 난다.

“에구, 시원해~ 여기서 한참 놀다가야겠네.”

우체국에서 피서를 하는 사람은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예 아침 먹고 출근하여 하루 종일 놀다 저녁에 직원들과 같이 퇴근하는 할아버지도 있다.

“어이구, 할머니 더운데 웬일이세요?”

허리 기억자로 꼬부라진 할머니 한 분이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캐리어에 커다란 박스를 싣고 들어선다.

“아이구 힘들어. 날이 워째 이리 더운겨.”

우체국 여직원이 얼른 정수기에서 얼음 물 한 잔 뽑아 할머니에게 내민다.

“할머니, 아니 이 무거운 걸 이 뙤약볕 속에 어떻게 들고 나오셨어요?”

“아들네 보낼 겨. 감자 한 상자하구 마늘 한 접...얼른 보내줘야 그것들이 먹지.”

“할머니, 이런 거 보내주면 며느리가 좋아해요? 서울에서 사먹는 게 훨씬 싸고 편하다고 하지 않아요?”

“아녀, 우리 며느리는 내가 보내주는 게 제일 맛있다누먼. 사먹는 건 아무리 비싼 걸 사도 이 맛이 안난다능겨. 그래서 김장거리 고춧가루 파 마늘 다 보내줘. 그 맛에 농사 짓는 거지. 맛있게 먹는 거 보면 재미나.”

난 며칠 전 서울 올라갔을 때 전철에서 본 두 젊은 여자를 떠올렸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어 둘의 대화를 어쩔 수 없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울 시어머니 때문에 짜증나 죽겠어. 이번엔 김치거리를 한 상자나 보낸 거야. 그거 다듬느라고 나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거실에 여기 저기 흙 떨어지고... 아니 마트에 가서 다듬은 거 사오면 얼마나 편한데. 사먹는 게 더 싸다니까... ”

“울 시어머니도 보내지 말라고 해도 계속 보내는 거야. 지난번엔 이것저것 보내준 거 그냥 풀지도 않고 경비 아저씨 주어버렸어.”

난 너무나 화가 났다. 정말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 아닌가. 그 땀과 수고를 너희들이 알아? 배추 뿌리에 묻은 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너희들이 알아? 보따리 보따리에 함께 쌓인 그 사랑을 너희들이 알아? 그래 사먹는 게 때깔도 좋고 더 쌀 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들은 땀 냄새 박박 씻어내버려 달콤함도 고소함도 짭짤함도 없는 밍밍하고 싱거운 것들이야.

“할머니 며느리는 그래도 착한가 보네. 요새 젊은 사람들 사먹는 거 더 좋아한다는데.”

“아녀, 우리 며느리하구 손주들은 뭐든 할머니네 꺼가 최고 맛있대. 지난 번에 내려왔을 때는 며느리가 김치를 담아가겠다는 겨. 왜 그러냐니까 내가 열무김치를 담가서 보내준 적이 있는데 손주 놈들이 그 뒤로는 즈이 어메가 담은 건 할머니 것보다 맛 없다고 할머니한테 좀 배우라고 한다는 겨. 그래서 열무 뽑아다가 내가 하는 식으로 같이 김치를 담그면서 차근차근 적어가더구먼.”

시원한 우체국 소파에 앉아 할머니와 나는 그렇게 두어 시간을 보냈다.

“우리 며느리는 배추 꼬랑댕이 하나도 버리지 않아. 그것도 따로 모았다가 송송 채 썰어 양념해서 무치더먼. 그러니께 자꾸만 더 보내주고 싶은 겨. 동네에서는 혼자 사는 노인네가 힘들게 뭘 그리 많이 심느냐고 하지만 자식들이 맛있게 먹고 좋아 하닝께 힘든 줄도 물러. 여간 재미난 게 아녀.”

시골에 내려와 나는 깨달았다. 세상에는 계산기 돌리며 따지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는 것을. 미국산 쇠고기가 아무리 싸다 해도 우리 쇠고기를 먹어야 하는 이유, 마트에 훨씬 모양 잘 빠지고 싼 농산물이 있어도 여전히 땀 흘리며 흙과 씨름하는 우리 부모님이 계셔야 하는 이유… 따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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